2025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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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항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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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인이 딸을 잃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그 아이의 병을 고치려 세상 모든 좋다는 것을 찾아다니느라, 속된 말로 아파트 몇 채 값을 들였으나 병은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랐는데, 뜻밖에도 딸이 떠난 후 지인은 날마다 죽고 싶다는 유혹과 싸우고 있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느님만의 권한이니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괴로움 대부분은 자책감이었는데 - 그녀가 딸의 발병에 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 ‘그땐 이 약을 먹여야 했어’, 그때는 이렇게 해야 했어 하는 것이었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기간이 이제 너무 길어져 딸의 죽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병들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어떤 강연에서 나 자신을 가리키며, “저는 고통 전문가입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한 적이 있었다. 반은 농담이었지만, 그 말이 당시 청중들에게 느낌을 많이 주었는지 가끔 그 이야기들을 한다. 뜻밖에도 그들은 나의 오만을 질책하지 않았는데, 내 말이 그들에게 어떤 위안 같은 것을 준 것 같았다. 내가 자칭 고통 전문가가 된 이유는 고통을 많이 겪어서였지만, 내가 그것을 겪어낼 방법을 여러 좋은 책에서 찾기도 해서라고 나는 믿는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모든 좋은 책과 모든 성인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다. 지금 여기 나 자신.


나쁜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나려고 할 때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 하는 말이었다. 대개의 경우 나쁜 일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내일 야외 행사가 있는데 비 예보가 있다면, 농사를 짓는데 엄청나게 가물었다면, 내 아이가 비뚤어진 길로 나가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면, 우산을 준비하고 물을 아껴 쓰고 그리고 아이에게 좋은 말로 타일러 보고 그리고는 침묵할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믿음이 약간 있기에, 그 침묵은 포기하는 침묵이 아니라 맡기는 침묵이 된다. 이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딸을 잃은 내 지인은 젊은 날 나를 많이 울게 한 분이었다. 어느 날은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좋은 사람들하고만 살면서 아무 걱정도 없이 하느님을 섬길까?’라는 부러움 때문에 그랬다. 당신 자신도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기에 질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나이를 먹고 나는 새삼 인생이 여러 가지로 공평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 자매는 그리하여 고통에 대한 항체를 거의 가지지 못하고 나이를 먹어버린 것이었다. 


늘 말하지만, 고통을 극복하는 데는 체력도 필요해서, 나는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고는 했다. 하느님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주셨고 대신 내게는 고통에 대한 항체를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어서 없던 항체가 자식의 죽음이라는 이토록 어마어마한 불행 앞에서 갑자기 생겨나기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지금 아픈 분들에게 그리하여 이런 위로를 드리고 싶다.


“지금, 하루라도 젊을 때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려봐요. 기도하고 읽으며 기다리다 보면 고통의 항체는 생겨나고 그 위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은총이 내립니다”라고.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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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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