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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예의 고장 공주, 282위 순교 성지로 거듭나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44. 공주(公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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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공주 충청 감영 옥’, 1911년 4월 25일. 유리건판.


박해 시기 282명 이상 순교한 거룩한 땅

충남 공주는 백제의 옛 수도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잡혀 죽임을 당하자 그 뒤를 이은 문주왕이 그해 10월 도읍을 웅진 지금의 공주로 옮겼다. 이후 공주는 538년까지 63년간 백제의 수도로 번성해 백제 중흥의 중심지가 됐다.

공주는 지리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잘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지였다. 백제 공산성이 이미 축조돼 있었을 뿐 아니라 금강 일대 나루터들이 발달해 군사 거점을 설치하기에 쉬웠다. 웅진 백제 시기 가장 전성기를 누린 임금이 바로 무령왕이다. 그의 왕릉도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에 자리하고 있다.

공주는 또 고려 시대 무신정권의 압제에 항거해 명학소 주민들이 민란을 일으킨 곳이다. 이 민란을 ‘망이·망소이의 난’이라 한다. 고려 시대 지방 행정 단위 중에는 특정 직업을 갖고 있는 장인들이 모여 사는 소(所)·향(鄕)·부곡(部曲)이 있었다. 향은 주로 특정 농경에 종사하는 이들이, 부곡은 왕조에 저항해 차별받던 양인들이 모여 살았다. 소는 기와·숯·소금·먹·비단·옹기 등 특산물을 생산해 공납하는 이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오늘날 공주 탄방동·둔산동 일대인 명학소는 숯을 생산하는 마을로 추정된다. 이곳 숯을 만드는 장인들이 무신 정권의 수탈에 직접 항거해 신분 해방을 외치며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조선 시대 공주가 낳은 대표 인물이 ‘김종서’다. 그는 1383년 충청도 공주목 요당면 비계곡(현 세종시 장군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양대군의 정변으로 71세에 처참하게 살해될 때까지 세종대왕과 함께 국경을 두만강까지 확보하고 6진을 개척했으며,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을 주도해 ‘문신관료’로 존경받았다.

충(忠)·의(義)·예(禮)의 고장인 공주는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 ‘거룩한 땅[聖地]’이다. 조선 왕조 치하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80년 병인박해 막바지까지 282명(기록상 실제 이보다 더 많은 신자가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됨)의 가톨릭 신자가 공주에서 순교했다.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비롯한 281명의 신자가 공주 충청 감영 옥에서 교수형으로, 독살로, 돌에 맞아서, 매 맞아서 순교하고,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형으로 치명했다. 황새바위 순교자 36위를 제외한 246위가 공주 감영 옥에서 순교했다.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공주 공산성 진남루’, 1911년 4월 23일,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공주 충청 감영 옥과 황새바위 순교지 순례

공주 충청 감영 옥과 황새바위 순교지에 처음 관심을 가진 이가 바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다. 그는 1911년 4월 25일 공주 충청 감영 옥과 황새바위를 순례했다.<사진 1> “지름 30m의 둥근 마당 한복판에 초라한 옥사가 있고, 그 앞에 지금은 일본인 간수들의 숙소로 쓰인 양철지붕 집이 보였다. 그게 전부다. 그러나 독실한 순교자들의 인고와, 굳건한 신앙을 비는 뜨거운 기도와,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영웅적 기상에 대해 비바람에 씻긴 감옥의 돌들은 입을 열어 증언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말마의 고통을 겪은 후 마침내 더러운 차꼬를 차고 형장으로 끌려왔다. 신앙을 위해 차마 형언하지 못할 고초를 겪고서, 기어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시 문밖으로 빠져나오는데, 모종의 야릇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로마 카타콤바의 어둡고 서늘한 통로를 빠져나올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열망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이 문턱을 넘었던가! 그들은 목에 큰 칼을 씌워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였다.

(?) 내를 따라 몇백m 더 내려가면 좁은 평지에 성긴 숲이 나타난다. 이곳이 형장이다. 순교자들의 피가 도적들의 피와 섞여 마른 모래를 적셨다. 냇물이 넘치면 피에 젖은 모래가 나무 밑까지 쓸려 왔다. 목 잘린 시신들이 묻히지도 못하고 뒹굴었다. 장마에 냇물이 불으면 시신들은 물살에 떠밀려 모래톱에 파묻히거나 인근 백마강까지 떠내려갔다. 숱한 시신이 가까운 언덕에 매장되어 무덤이 온 언덕을 뒤덮었다. 순교자의 무덤과 범죄자의 무덤이 한데 섞여 구별되지 않았다. 무덤가에 수줍게 핀 푸른 제비꽃이 숨은 영웅들의 고귀한 정신을 상기시켜 주려는 듯 달콤한 향기를 뿜는다. 향은 우리 알프스의 제비꽃과 비슷했다. 여기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소리 없는 인사를 알아들었다. 이 제비꽃을 집으로 가져가 여기 잠든 성인 성녀와 죄 없는 아이들의 굳은 신앙을 기억하려 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34~336쪽)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루블레 신부와 아이들’, 1911년 4월 23일,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공주 공산성에서 바라본 강’, 1911년 4월 23일,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공주성당 주일 미사 봉헌 후 공산성에 올라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4월 22~25일 공주를 여행했다. 그와 일행은 기차를 타고 조치원에 내린 후 남서쪽으로 이어진 신작로를 이용해 공주에 도착했다. “길은 낮게 물결치는 구릉 사이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자잔한 산들이 다가왔다. 그 뒤로 육중한 산맥이 길게 버티고 있었다. (?) 길이 굽이쳐 산을 감고 올랐다. 모퉁이를 돌아 굽어보니 돌연 강물이었다. 강 저편이 바로 공주로구나. 길이 암벽을 운치 있게 파고 들었고, 길 왼쪽의 강물은 떨어질 듯 아득했다. (?) 공주는 이 뾰족바위 뒤편 넓은 분지에 있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12~314쪽)<사진 2>

베버 총아빠스는 제일 먼저 공주성당(현 공주중동성당)을 방문했다. 1909년 이곳에 부임한 앙리 루블레 신부가 한 시간 전부터 마을 어귀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성당은 마을 어귀 가장 예쁜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성당에 모여 베버 총아빠스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남녀 교우들이 차례로 반갑게 인사했다. 본당 어린아이들은 루블레 신부를 보자 성당 마당으로 뛰어나와 장난을 쳤다.<사진 3>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공주본당 신자들과 함께 주일 미사를 봉헌했다. 교우들은 주일 오후이지만 농번기여서 모두 농사를 지으려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산성’에 올랐다.<사진 4>

“산은 백마강을 따라 일어난 산맥에서 벗어나 고을과 강 사이에 끼여 있었다. 이곳에 산성을 쌓았다. 고을이 위기에 처할 때 산성은 강력한 보호막을 제공한다. (?) 산길은 퇴락한 성문을 통해 산성으로 이어졌다. 꼭대기에 성루가 보였고 그 바로 옆으로 허물어져 가는 성벽이 지나갔다. 갈라진 골짜기 사이는 깊은 절벽이었다. (?) 성벽 따라 ‘길 없는 길’을 기어올랐다. 성벽에서 떨어진 돌들이 가파른 비탈에 구르고 있었다. 성벽 틈새로 먼 능선의 보랏빛 물결을 보았다. 지는 해의 그윽한 광채를 받아 석양의 깊은 그림자가 능선을 붉게 물들였다. 이 놀랍도록 신비스런 그림 속에 우리가 서 있었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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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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