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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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상본이 낳은 기적의 도시 독일 케벨라어 성모 성지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42. 독일 케벨라어 성모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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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벨라어의 은총 소성당(앞)과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뒤). 브라반트의 셰르펜회벨 은총 소성당을 본떠 1654년에 육각형 돔 형식으로 세운 소성당으로, 지나가는 순례자가 바깥에서 위로의 성모님을 뵐 수 있도록 설계됐다. 바실리카는 첨탑이 90m인 네오고딕 양식의 순례자 성당으로 19세기에 건설됐다. 1923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준대성전으로 지정됐다.

우리 주변에서 상본(像本)을 자주 봅니다. 기도와 묵상을 돕는 이미지로, 사제서품식 때 출사표처럼 기념 성구를 넣어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고, 축일 때 책과 함께 카드처럼 선물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본 문화는 14~15세기 유럽 라인강 지역에서 주로 시작됐습니다. 글을 모르던 이가 대다수였던 당시 성화나 상본은 한 장짜리 ‘가난한 이들의 성서(biblia pauperum)’였습니다. 신앙 교육 자재이자 하느님을 체험하는 수단이었죠.

특히 먼 길을 떠나온 순례자가 성지에서 구한 성화 한 장은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었습니다. 성지를 자기 집으로 옮겨오는 특별한 일이었지요. 그 일은 때로 엄청난 기적을 낳았습니다. 바로 오늘 가볼 순례지인 케벨라어에서 말입니다.

케벨라어는 독일 북서부 라인강 하류 쪽 네덜란드 국경과 가까운 조그만 마을이었습니다. 작은 성모님 상본 하나로 거대한 순례의 파도가 일어나, 매년 80만 명이 찾는 ‘성모님의 도시’가 됐지요. 
은총 소성당에 모셔진 1640년도 룩셈부르크 성지에서 가져온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 원본 상본(왼쪽)과 1649년도 케벨라어 성지의 상본(오른쪽). 성모자상은 거의 비슷하나 배경이 된 도시와 소성당, 아래 문구가 다르다.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의 주 제대. 1992년 새롭게 봉헌된 제대로 성녀 우르술라와 성 토마스의 성유물이 옮겨 안치되어 있다. 주변으로 슈툼멜(1859~1919) 공방이 제작한 벽화들이 보인다.

룩셈부르크의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 상본

신·구교 간의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1641년 성탄 무렵, 상인인 헨드리크 부스만은 케벨라어 들판에 세워진 십자가 앞에 기도하던 중 ‘여기에 나를 위한 작은 경당을 세워라’라는 신비로운 목소리를 듣습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죠. 일주일 뒤 다시 그 앞에 이르렀을 때 같은 목소리를 듣습니다. 며칠 후에도 똑같은 일을 겪자 언젠가 소성당을 짓겠다고 맹세합니다.

몇 달 뒤, 부스만의 아내는 한밤중에 집 안에서 빛 속에 나타난 성모님과 소성당 환시를 봅니다. 그 모습은 얼마 전 길에서 만난 두 명의 병사가 보여준 작은 상본(약 7.5×11㎝) 속 성모님과 같았습니다. 병사들은 상관에게 전해줄 상본을 들고 있었는데, 그중 한 장을 팔려고 그녀에게 보여준 것이죠. 부스만은 처음에 반신반의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자기 집이 환히 빛났다는 소문을 주위에서 듣고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이 겪은 일과 이어져 있음을 느끼고, 결국 그 상관에게 상본을 사들입니다. 그 상본은 바로 전에 소개한 룩셈부르크의 ‘고통받는 이들의 위로자’(‘간 김에 순례’ 27회) 상본이었습니다.

케벨라어 본당 신부는 1642년 6월 1일 성령 강림 대축일 전 주일에 아내가 환시에서 본 모습대로 부스만이 세운 경당에 이 상본을 모십니다. 그날부터 인근 마을에서 많은 이가 모여들었고, 기적이 일어나면서 순례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전쟁으로 불안한 시기였지만, 순례자의 수는 해마다 늘어났습니다. 교구는 순례자를 위해 촛불 소성당을 세웁니다. 각 지역의 순례자가 거대한 초를 가져와 봉헌하는 전통이 있는데, 장소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30년 전쟁이 절정에 치닫던 1643~1645년에 성당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당시의 신앙과 희생이 어떠한지 잘 보여주지요.

1647년 교구 시노드는 부스만의 진술을 확인하고 조사 후 케벨라어를 공식 순례지로 인준합니다. 이례적인 신속한 결정은 신자들의 자발적 성모 신심과 순례자의 폭발적 증가 덕분이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케벨라어 상본이 독일·네덜란드·벨기에 등지로 퍼져나갑니다.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 본랑. 길이 약 70m, 폭 28m의 삼랑식 구조 네오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금별이 새겨진 천장과 제단 주변의 서사 패널이 인상적이다. 가대와 후진부터 측랑까지 구원사의 사건들로 벽화가 꾸며져 있다.
촛불 소성당. 순례자를 위해 처음 만든 소성당이다. 매년 주변의 순례자 행렬이 성당에 큰 초들을 봉헌해 왔는데, 촛불 아래 새겨진 문장은 이러한 행렬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특히 리스 공동체는 1643년에 케벨라어를 처음 조직적으로 순례해 초를 봉헌했다.

도심 속 위로와 희망의 장소

케벨라어 역에 가까워지면 회색 지붕들 위로 불쑥 솟은 첨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90m 높이의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입니다. 역과 가까운 도심 한복판에 은총 소성당과 촛불 소성당이 있고, 그 맞은편으로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와 고해성사 소성당·성체성사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654년 부스만의 경당 자리에 은총 소성당을 세우고 그곳에 상본을 모십니다. 은총 소성당은 바깥으로 반원형 시선창이 나 있어, 밖에서도 순례자가 위로자이신 성모님을 보며 기도할 수 있는 열린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남쪽으로 난 세 개의 문으로 성당에 다시 들어와 제대 뒤 상본을 가까이서 볼 수 있지요. 한동안 상본은 부스만이 만든 나무판 위에 그대로 붙어있었으나, 1664년에 금세공 공방에서 봉헌한 은제 액자에 모십니다. 지금 액자는 1681년 외팅겐 공작이 봉헌한 것입니다.
케벨라어 은총 소성당 제대(위)와 바깥 시선창에서 본 은총의 상본(아래). 먼저 소성당 바깥에서 위로의 성모님을 뵙고, 내부에서 기도한 뒤, 제대 뒤쪽 통로로 성화를 좀 더 가까이 대면할 수 있다. 소성당은 천정 육각 볼트와 벽면을 활용해 구원사에서 성모님의 신학적 위치를 집약적으로 그린 벽화와 스투쿠로 장식되어 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네오고딕 양식의 성모 바실리카는 1858년 착공해 1884년 완공됐습니다. 이 성당은 길이 약 70m, 폭 28m의 삼랑식 구조로 서쪽 첨탑은 90m에 달해 성지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내부에 들어서면 장대한 벽화들이 제대 주변으로 펼쳐집니다. 프리드리히 슈툼멜과 그의 제자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 교회 구원사, 성경·전례 장면을 유기적으로 배치해 순례자들이 눈으로 구원의 서사와 그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을 묵상하도록 했지요. 그 정점은 주 제대입니다. 제대 위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와 성 삼위를 주제로 한 조각과 화려한 장식이 놓여있고, 순례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쪽 ‘천상모후의 관을 쓰는 성모’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바실리카 전체가 성체성사와 성모 신심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것이죠.

17세기 독일 라인강 지역은 인쇄술의 발전으로 종이 상본이 널리 퍼졌습니다. 케벨라어에서는 한 장의 상본이 은총의 상징이자 이 도시의 정체성이 되었고, 우리에게 순례의 길을 열어주었죠. 이 전통은 21세기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9월 7일 우리 교회는 카를로 아쿠티스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성인은 온라인으로 복음을 전한 ‘하느님의 인플루언서’였고, 그가 만든 웹사이트는 전 세계 순례자들의 가상 성체조배 공간이 되었습니다. 17세기 판화로 찍은 상본으로 성모 신심을 전했던 것처럼 21세기 성 카를로는 직접 코딩한 웹사이트라는 ‘디지털 상본’을 통해 성체의 기적을 사람들에게 전했던 것 같습니다. 매개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음을 케벨라어에서 느낍니다.
 
<순례 팁>

※ 쾰른·뒤셀도르프·크레펠트에서 기차로 이동하면 좋다. 역에서 은총 소성당까지 도보 10분.

※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 미사: 주일과 대축일 8:15·10:00·11:45·18:45, 평일 10:00,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크게 지낸다.

※ 유럽의 다른 순례지에 관한 알찬 정보는 「독일 간 김에 순례– 뮌헨과 남부 독일」(분도출판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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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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