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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사제와 순교 [류재준 그레고리오의 음악여행]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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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는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며, 대의를 위해 핍박받는 행동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새로운 믿음이 받아들여질 때 특히 순교자가 많음은 동서고금이 똑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부터 기득권 세력이 가톨릭에 적대적이 아니었다는 것이 흥미로우며, 신앙이 전파된 것도 선교사에 의한 일반적인 수순이 아니라 자생적이었다는 것이 독특하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 인물 중 한 사람인 이승훈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직접 찾아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첫 영세자가 되었다.(고려 때에도 몇몇 이가 세례를 받았다는 얘기가 구전되기도 한다.)

이승훈뿐 아니라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종, 이벽·권일신 등 지도층 인사들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입교하였다. 이렇게 알음알음 뿌리를 내리고 있던 교세에 첫 번째 먹구름이 끼는데, 바로 신해박해다. 원인은 위패를 태우고 제사를 폐했다는 것인데, 당시 북경 주교였던 구베아는 이를 원리적으로 해석하여 허용하지 않았지만, 비오 6세 교황은 이 문제에 대해 관대하고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쉽기 그지없다.

프랑스 혁명에 휘말려 큰 고초를 겪던 비오 6세 교황은 선교사 파견 없이도 만들어진 조선의 그리스도교 세력을 기적으로 여기고 큰 위안을 받았다. 교황은 구베아 주교에게 여러 번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종용하며 특별히 은화를 보내기도 했다. 만일 비오 6세 교황의 제사 허용이 좀 더 일찍 알려졌다면, 구베아 주교가 좀 더 신중했다면 한국인 첫 사제였던 성 김대건 신부 외 수많은 교인의 목숨이 스러지지도 않았을 터이다. 당시 정약용은 정조에게 구베아 주교는 제사도 받지 못한 갈백(탕왕이 토벌한 폭군)이 되살아난 악인이라고 극언을 했을 정도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역시 안타깝기 그지없다. 당시 많은 권력자가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배교를 권유했지만 의연히 죽음을 택한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김대건 신부의 생명줄이었던 프랑스 함대들은 사실상 포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이익을 우선했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인들의 운명을 훤히 알면서도 일말의 거리낌 없이 그들을 내쳤다. 역사는 가정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조선이 조금만 더 천주교에 관대했다면 서양문명과의 조우가 좀 더 빨라졌을 것이고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초기 선교 과정은 보면 볼수록 안타깝고 아쉽다.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는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이라서 황제의 노여움을 사 순교한 성 세바스티아노를 위한 작품을 작곡했다. 성 김대건 신부에게 등 돌린 프랑스 출신 작곡가의 순교에 대한 작품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드뷔시 ‘성 세바스티아노의 순교’,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youtu.be/oG8T8twoVhg?si=m5TbL15L2U4YrOwv







작곡가 류재준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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