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하늘 나라를 위한 금욕이 하나의 포기라면 나에게 주어진 선물에서 무엇을 포기했는지 그것을 먼저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은 버린 것이 아니라 몸의 혼인적 의미와 내적으로 깊은 조화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즉 동정 독신의 소명 안에서 본능적인 ‘에로스와 양립할 수 있는가?’를 확인한 것이다.
동정 독신의 성소는 그리스도의 정감적 현존이라는 선물을 확인하고(「신학대전」, I-II, q. 108), 그분이 나에게 건너오고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L.M. Mendizabal) 그리스도의 거처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정감적 일치는 주님의 일을 걱정하는 모든 이를 아버지께 모아들이기 위해, 그분께 모든 지향을 맞추는 특별한 삶의 근간이 된다. 받은 선물로 충만한 동정 독신 생활은 ‘에로스’의 최종적 의미, 곧 종말에 살게 될 삶을 역사적 시간 안에서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성’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를 넘어서길 요구한다.
사도 바오로는 혼인을 ‘잘하는 것’으로, 동정 독신 생활을 ‘더 잘하는 것’으로 말한다. 동정 독신 생활을 바라보는 바오로의 시각은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둔 권고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와의 사랑이 인격적 관계로 그 어떤 것에서도 방해받거나 굴레를 씌우지 않으며, 오직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다(1코린 7,35 참조). ‘섬기게 하려는’, 즉 금욕 동정의 이유는 갈린 마음 없이 오직 한 가지, 곧 ‘주님의 일’을 걱정하기 위해서다.(1코린 7,32 참조)
‘주님의 일’은 ‘온 세상을 위한 원고독’을 뜻한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0,26)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는 일에 사랑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기 위해서다. 인간과 하느님의 인격적 관계, 곧 내적 친밀감으로 하나를 이루는 관계다. 그리고 ‘하늘 나라를 위해’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의식적 선택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창세 2,18)”, 곧 하느님 앞에서의 원고독이 가져오는 ‘아픔’ 안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통해 원고독의 아픔은 하느님만이 궁극적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 분임을 갈망하고 증거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동정은 불임이 아니라 영적 부모성을 갖는 것이라 했다. 여기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성령 안에서 몸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독신 성소를 ‘양성(養性)’의 문제일 뿐 아니라 ‘변화하고 성숙하는 과정’이라 말하는 이유다. 어느 성소든 성의 참된 의미를 알고 삶에 녹여낼 수 있다면 왜곡된 성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성에 든 선(善)의 내재된 의미를 바르게 알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서두에서 “선(善)은 모두가 갈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완전함을 갈망할 때 그 선 자체를 갈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몸 자체가 그런 지향을 담고 있기에 가능하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이어가시면서 반복적으로 ‘보시니 좋았다’ 하셨고, 사람이 죄를 범한 후에도 그것을 나쁘다 하지 않으셨다. 그 안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욕망 중 특히 성욕과 식욕을 볼 수 있다. 그 욕망들에 의해 역사는 멈추지 않았고, 구원의 역사 또한 이어졌다. 욕망 안에 든 선을 보고 갈망할 때,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한 인격으로 완성되는 질서에 놓이게 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