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성지 167곳을 모두 순례한 본당 공동체가 있다. 대구대교구 경산 백천본당(주임 정재성 요한 사도 신부)은 2022년 11월 8일 안동교구 우곡성지에서 여정을 시작해, 올해 5월 1일 제주교구 황사평성지에서 마침표를 찍으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발간한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에 수록된 모든 성지를 순례했다. 정재성 신부를 비롯한 27명의 완주자는 주교회의 순교자현양과 성지순례사목위원회(위원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가 수여하는 축복장을 받는다. 미사 참례자가 400명 남짓한 본당에서 평균 40여 명이 매번 순례에 함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완주자 27명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친교’를 위한 출발
“본당 신자들과 함께 성지에서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음식을 나누며 친교와 기쁨,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2022년, 정재성 신부는 대구대교구가 2023~2024년 두 해 동안 지내게 될 ‘친교의 해’를 앞두고 본당 사목계획을 고심하고 있었다. 친교의 가치를 더욱 깊이 깨닫고 활성화하는 데 역점을 둔 그의 결정은 성지순례. 박해 앞에서도 ‘함께’ 신앙생활을 지켜갔던 선조들의 흔적을 따르는 길은 공동체가 친교 안에 일치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신자들 반응도 뜨거웠다.
“본당 신자들이 함께 전국 성지를 도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에 다들 기뻐하며 동참했습니다.” 이재순(안젤라) 본당 총회장이 당시 분위기를 회고했다. “우리 공동체가 단합하기 쉽지 않고, 기도라든지 신앙생활에 다소 아쉬운 점이 많다고 생각하던 차에 신부님의 제안이 정말 반가웠습니다.”
본당은 2022년 11월부터 매월 둘째 화요일마다 성지순례를 떠났다. 한 번 갈 때마다 동참한 인원은 40여 명. 각자 이동하는 것보다는 전세버스를 이용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고, 좌석 수를 고려해 1회 참가 인원 기준을 40명으로 정했다. 미사와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을 봉헌하고, 단체 이동을 위한 준수사항 등 기본적인 규칙도 정했다. 회차가 늘면서 본당은 어느덧 성지순례의 ‘고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본당 사무장 박지영(엘리사벳) 씨는 “성지마다 스탬프를 찍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 참 뿌듯했고, 신부님께서 어렵게 섭외하신 맛집에서 식사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며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향기를 풍기는 참된 신자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정 신부는 순례지를 정하기 위해 매달 전국 지도를 펼치고 머리를 싸맸다. 신자들은 조를 나누고 간식 준비를 하는 등 순례에 어려움이 없도록 자발적으로 나섰다. 이찬기(제준 이냐시오) 홍보위원장은 참가하지 못한 신자들을 배려하는 뜻에서 순례 때마다 찍은 사진과 영상을 본당 온라인카페 게시판에 실었다. 게시물은 참가했던 신자들에게도 순례 때의 감동과 다짐을 되새기는 데 한몫했다.
본당 신자로 순례에 참여하고 완주자에 이름을 올린 역사학자 김정숙(소화 데레사) 영남대 명예교수는 “성지순례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 사람들이 많다”면서 “아침 식사부터 시작해서 신부님을 도와 적극적으로 나서서 봉사한 교우들 덕분에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감사를 전했다.
순교자를 ‘롤모델’로
신자들은 신앙 선조들의 삶과 순교의 현장을 함께 찾아다니며, 그 믿음 안에서 깊은 감동을 나누었다.
안시연(요안나) 씨는 “순례지마다 순교자들의 죽음과 애환에 마음이 많이 저미고 솔직히 억울함도 느꼈다”며 “성지순례가 여행이나 도장 찍기에 머물 수 없고, 신앙 선조들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걷는 길임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성지순례는 버킷리스트였다”는 전이순(가타리나) 씨는 “직접 현장에서 순교자들의 믿음을 듣고 보고 체험하면서 그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순례를 거듭할수록 커졌다”며 “성지순례를 제 삶의 1순위로 두고, 앞으로도 어디든지 기회가 오면 가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찬기 홍보위원장은 “성지를 갈 때 그냥 가는 것보다는 미리 공부하고 가면 아는 만큼 보이더라”면서,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를 갔을 때 그런 생각이 깊이 들었다고 전했다.
성지순례는 신자 각자에게 영적 체험이었지만, 공동체로서는 ‘함께’의 중요성을 실감한 계기였다. 김성하(요세피나) 씨는 “죽림굴을 갈 때 가장 힘들었다”며 “교우가 힘들어할 때 옆에서 도와주던 동료들의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밝혔다.
성지순례가 정재성 신부에게는 사목적으로도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다. 정 신부는 “성지를 순례할 때마다 성인, 성녀들 또 순교자들이 저에게 말씀을 해주시더라”며 “그 말씀을 기억하며 사목 현장에서 신자들과 함께할 때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숙 교수는 “성지도 살아 있는 유기체”라며 “신자들이 성지를 자주, 꾸준히 방문해야만 그 성지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