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률 시토회(트라피스트회) 블로박 수도원 묘지에서 칼레 신부와 박상근 복자의 후손들이 정도영 신부와 수도원장 수녀 등과 함께 칼레 신부 무덤에 절하고 있다.
칼레 신부·박상근 우정, 후손으로 이어져
박해 피해 조선 떠났지만 평생 그리워해
칼레 신부 무덤 방문한 순례단 슬픔 표해
조선 선교에서 시토회 수도원까지
1866년 병인박해 속 경북 문경에서 피어난 프랑스 사제와 조선 평신도의 아름다운 우정. 교황 파견 선교사 칼레 신부와 박상근(마티아) 복자의 이야기는 연극으로도 제작된 안동교구의 오랜 자랑이다.
160년 만에 이들의 후손이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준 정도영 신부도 신학생이던 1996년 이 연극에서 칼레 신부 역을 맡았다. 그리고 2020년 박상근 복자 무덤이 있는 마원성지 담당으로 부임하면서 그는 다시 칼레 신부에 관심을 가졌다. 2019년 안동교구가 설정 50주년을 맞아 칼레 신부의 불어 전기를 번역 출간한 덕에 도움이 됐다. 프랑스 르망교구에 파견된 이영길 신부가 우리말로 옮긴 「조선 선교에 바친 삶」이었다.
정 신부는 이 책 한 권에 의지한 채 프랑스로 떠났고, 칼레 신부의 고향 크리옹에서 후손 마르틴씨와 남편 아메드씨를 만났다. 문경과 크리옹을 잇는 ‘우정의 순례길’은 이렇게 시작됐다.
1957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칼레 신부 전기 원제를 직역하면 「조선 선교에서 시토회 수도원까지」다. 1884년 5월 22일 칼레 신부가 지도 사제로 지내다 선종해 묻힌 곳, 엄률 시토회(트라피스트회) 모벡 수도원의 도서관 사서 수녀가 쓴 책이다. 사후 73년 만에 처음이자 유일한 전기가 나온 것이었다.
칼레 신부, 조선대목구장으로 추천되다
정든 선교지 조선과 작별하고 모벡 수도원에 오기까지 칼레 신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866년 10월 그는 페롱 신부와 함께 생존 선교사 중 마지막으로 한반도를 떠났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또 10년 동안 목자 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가까스로 산동반도 지부에 도착한 칼레 신부는 영국 무역상 퍼거슨(T. T. Fergusson)의 도움을 받았다. 가톨릭 사제였다가 환속한 그는 몇 년째 조선 파견 선교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한국 교회의 숨은 공로자였다. 칼레 신부는 이어 파리외방전교회 상해대표부로 가서 박해 보고서를 작성해 본부로 보냈다. 박상근 복자와의 눈물겨운 이별도 이때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또 조선에 돌아갈 방법을 찾고자 만주대목구로 향했다. 선교사 3명, 블랑·마르티노·리샤르 신부가 원군으로 파견됐다. 블랑 신부는 훗날 조선대목구장(7대)이 되지만, 나머지 두 신부는 조선 땅을 못 밟고 만주에서 눈을 감는다.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는 1868년 조선 선교사들에게 한반도와 가까운 요동반도 남쪽, 차구의 눈의 성모 성당 재치권을 양도했다.
칼레 신부가 본당 주임이 돼 조선 입국을 몇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동료가 칼레 신부를 공석 상태인 조선대목구장으로 추천했다. 함께 파리를 떠난 1860년부터 동고동락한 리델 신부였다.
“그는 약하고 허약함에도 용기로 자신의 건강을 늘 지탱하고 있고, 명랑한 성격으로 모든 동료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 그의 깊은 신심은 저희 모두에게 감화를 줍니다. 저는 이 친애하는 동료가 그가 지닌 평범한 재능으로, 학식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동료보다 더욱 잘 해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레 신부는 건강 악화로 1869년 5월 상해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갔고, 리델 신부가 제6대 조선대목구장 주교가 됐다.
트라피스트회 에그벨 수도원 모습.
칼레 신부가 두 번이나 문을 두드린 트라피스트회 에그벨 수도원 성당에서의 아침 기도 모습.
프랑스 귀국 후, 수도원 문을 두드리다
고국에 도착한 칼레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가는 대신, 리옹에서 남쪽으로 100여 ㎞ 떨어진 에그벨(Aiguebelle) 수도원으로 향했다. ‘트라피스트회’라고 불리는 관상 수도회엄률 시토회(1892년 시토회에서 분리 독립) 수도원이었다. 12세기 설립된 에그벨 수도원은 프랑스 혁명 때 폐쇄됐다가 1816년 재건됐는데, 한국 교회와도 인연이 있다. 바로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주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대신학생 시절 피정을 한 장소였다. 기도와 침묵 속에서 선교사가 되겠다는 확신을 얻은 그는 1818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칼레 신부는 반대로 파리외방전교회를 떠나 수도자가 되려 했다. 그러나 에그벨 수도원장 몸베(Mombet) 아빠스는 쇠약한 상태인 그가 수도생활을 버틸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해 입회를 거절했다. 할 수 없이 10년 만에 고향 크리옹에 돌아와 가족과 상봉한 칼레 신부. 이어 그는 가까운 엥빌본당에서 1년간 보좌 신부로 지냈고, 회복한 뒤 다시 에그벨 수도원을 찾았다. 1871년 5월 입회가 허락됐고, 칼레 신부는 ‘콩스탕(콘스탄치오)’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지병이 재발해 2달 만에 낙담한 채 수도원을 떠나야 했다.
그 심정을 헤아리면서 칼레 신부와 박상근 복자 후손들은 프랑스 순례 중이던 지난 7월 22~23일 에그벨 수도원에 묵었다. 현재 이곳엔 수사(50~98세) 17명이 생활하고 있다. 순례단은 수사들과 함께 오전 7시 아침 기도와 미사에 참여했다.
알제리 내전 중이던 1996년 5월, 반군 세력에 납치돼 살해당한 알제리 티비린 수도원 수사 7명의 사진.
알제리 내전 중이던 1996년 5월, 반군 세력에 납치돼 살해당한 알제리 티비린 수도원 수사 7명을 묘사한 조각.
알제리 내전 중이던 1996년 5월, 반군 세력에 납치돼 살해당한 알제리 티비린 수도원 수사들. 수도원장 크리스티앙 드 셰르제 신부(맨 왼쪽)을 비롯해 이름이 적힌 7명이 순교자들이다.
에그벨 수도원에서 만난 현대의 순교자들
수도원을 떠나기 전, 순례단은 ‘티비린 기념관’이란 곳에 들렀다. 에그벨에서 분가한 알제리 티비린 수도원의 순교자를 기리는 공간이다. 알제리 내전 중인 1996년 반군 ‘무장이슬람단체(GIA)’에 납치돼 살해당한 수사 7명이다. 병인박해로부터 130년, 지구 반대편에선 여전히 순교가 이어지고 있었다. 2010년 프랑스에선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신과 인간」이 개봉했다.
기념관 안에는 수도원장 드 셰르제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사진과 성화·조각상 등이 있었다. 이들은 2018년 12월 8일 알제리 제2의 도시 오랑에서 다른 알제리 순교자 12명과 함께 시복됐다. 15년간 오랑교구장을 지낸 클라베리 주교도 그중 하나였다. 종교 간 평화로운 공존을 꿈꾼 그는 해박한 이슬람 지식과 포용적인 태도로 ‘무슬림의 주교’로 불렸다. 그러나 1996년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폭탄 테러로 순교했다. 친구이자 운전사인 21세 무슬림 청년 무함마드 부키치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2년 뒤 암살범들이 사형 선고를 받자 알제리 교회는 감형을 요청했다.
순례단 중 알제리 베르베르족 출신 무슬림인 아메드씨는 전시물을 가장 유심히 살펴봤다. 그는 수도원 서점에서 티비린 수사들의 전기도 샀다.
라 트라프 수도원 입회 후 모벡 수녀원으로
에그벨을 떠나 고향에 돌아온 칼레 신부는 베네스트로프 본당 주임으로 4년을 사목했다. 그리고 디외즈 근처 게블랑주 본당 주임으로 3년간 활동했다. 그는 수도자처럼 철저히 금욕과 고행을 하면서 조선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순례단은 두 곳 성당을 순례한 데 이어, 당대 본당 사제생활상을 살피기 위해 아르스를 방문했다.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가 1818년부터 1859년까지 42년간 사목한 곳으로, 옛 사제관에 당시 그가 사용했던 유품이 전시 중이었다.
마침내 1878년 칼레 신부는 노르망디의 라 트라프(La Trappe) 수도원에 입회했다. 트라피스트회라는 이름이 유래한 곳으로, 시토회 개혁 중심지였다. 이번엔 ‘마리(마리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때마침 「전교회 연보」에 실린 블랑 신부의 편지를 읽었다. 그리운 동료인 리델 주교가 조선에 재입국했으나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는 내용이었다. 칼레 신부는 기도와 고행을 갑절로 늘렸다. 모범적인 수도자였던 그는 1880년 유기서원에 이어 1883년 종신서원을 할 수 있었다. 결핵에 여러 병을 앓고 있었지만, 서원을 앞두고 다행히 호전됐다.
칼레 신부가 두 번이나 문을 두드린 트라피스트회 에그벨 수도원 성당 풍경.
모벡에서 블로박을 거쳐 문경까지
이듬해인 1884년 수도원장 살라스크(Salasc) 아빠스는 칼레 신부를 모벡 수도원 지도 사제로 발령했다. 병약한 칼레 신부가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건강을 회복하길 바라는 뜻에서였다. 모벡 수도원은 100명이 넘는 수녀가 양잠업과 보육원 운영에 힘쓰는 곳이었다. 2월 8일 모벡에 도착한 칼레 신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열정적으로 사목한 지 3달 만에 하느님 품에 안겼다. 선교사였던 그를 기리기 위해 발에는 꽃다발이 장식됐다.
모벡 수도원은 1991년 규모를 축소해 남쪽으로 약 90㎞ 떨어진 블로박으로 이전했다. 1836~1986년 150년 동안 모벡에서 세상을 떠난 수녀 479명 유해도 블로박 수도원 묘지로 이장, 무덤 하나에 합장했다. 칼레 신부의 유해도 여기에 같이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침내 7월 23일. 칼레 신부의 무덤을 찾은 순례단은 블로박 수도원장 베네딕타 아봉 수녀와 함께 한국식으로 절을 올렸다. 모두 눈시울이 붉어진 가운데 박상근 복자의 후손인 박현자(마르가리타)·현주(보나)씨 자매는 “마원성지의 복자 무덤과 달리 봉분 하나 없이, 이렇게 작은 공간에 수백 명과 함께 묻혀 계신 모습을 보니 솔직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블로박 수도원 묘지에 있는 칼레 신부 무덤에 있는 표석과 칼레 신부 전기 번역본. 표석에 '마리 알퐁스 칼레'라고 적힌 것은 오류로, 칼레 신부의 본명은 '니콜라 아돌프 칼레'이며 '마리'는 수도명이다. 표석 내용은 옳게 수정될 예정이다.
순례단을 이곳으로 이끈 칼레 신부의 전기 번역본 2권을 무덤에 놓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 권은 2019년 이영길 신부, 다른 한 권은 2024년 김정숙(아기 예수의 데레사,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가 번역한 책이었다.
박상근 복자의 후손들은 칼레 신부의 무덤에 있는 솔방울과 흙과 돌을 챙겼다. 그리고 귀국 후인 지난 8월 8일 마원성지의 복자 무덤 봉분에 이를 묻었다. 천국에서 재회한 사제와 평신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우정의 순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