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시 향남읍의 작은 시골 마을. 두 팔 벌린 예수상이 환히 길을 밝혀준다. 묵주기도의 길, 십자가의 길, 그리고 하늘을 향한 종탑까지. 이곳이 하느님의 집임을 알린다. 성당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마치 인간의 땅에서 하느님의 땅으로 들어선 듯한 경외감이 밀려온다. 신자들이 함께 가꾼 하느님의 집은 누구에게나 천국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이렇듯 신앙의 향기가 깊게 배어 있는 제1대리구 발안성당(주임 문상운 알베르토 신부)을 찾았다.
순교자 얼 스민 땅에 세운 지역의 큰 울타리
박해 때부터 이 지역에는 양감면 용소리 ‘양간 마을’과 요당리 ‘느지지 마을’ 등의 신앙공동체가 자리했다. 이중 느지지 마을에서 장주기(요셉, 1803~1866) 성인이 태어났다. 슬기롭고 신앙심이 깊었던 그를 모방 신부는 전교회장(공소회장)으로 임명했다고 전해진다. 기해박해를 피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난 성인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충북 제천 배론에서 체포돼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인의 6촌 동생 장 토마스도 느지지 마을 출신이다. 이처럼 순교자의 얼이 스며든 땅 위에 발안성당이 세워졌다.
경기도 최초의 본당인 왕림본당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임응승(요한 사도) 신부는 화성 지역 복음화를 위해 신자들과 함께 교통의 요충지였던 발안에 성당을 세웠다. 신자들의 땀과 정성으로 성당은 1956년 완공됐다.
당시 성당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종소리는 10리(약 4km) 밖까지 울려 퍼졌다. 라디오조차 귀하던 시절, 주민들은 종소리를 통해 시간을 알았으며, 신자들은 밭일을 멈추고 삼종기도를 바쳤다. 모든 마을 사람이 성당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종소리가 울리는 곳이 성당임을 알았다. 발안성당은 이처럼 지역의 큰 울타리였다.
본당은 농촌 지역 공동체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1970년 ‘비안네 농장’을 설립해 향나무, 뽕나무, 참외, 포도를 재배했다. 농장 수익으로 농민교육원을 세워 지역 농민을 도왔고, 누에를 길러 양잠 기술을 전파했다. 이어 1976년 ‘꿀벌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해 신자 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금융기관을 세웠다. 이는 오늘날 발안신협의 모태가 됐다.
시대의 아픔도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이·미선이 추모집회를 위해 성당 운동장을 제공했고, 지금은 잘 가꿔진 정원과 운동장이 주민들의 쉼터로 자리 잡았다.
마음에 평안 주는 하느님의 정원, 사랑으로 피어나다
현재 성당은 1999년 새로 지어졌다.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예수님을 지나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기와지붕처럼 보이는 성당의 지붕과 초가지붕을 얹은 정자가 겹쳐 보인다. 성당 외부의 거대한 동판 지붕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갓을 형상화했다. 정자 앞에는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커다란 묵주알이 둘러싸고 있는 이곳에는 묵주기도의 길과 십자가의 길이 함께 조성돼 있다. 푹신한 잔디밭 위에서 성모님을 바라보며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도를 마치고 천국의 문을 지나면 이곳이 하느님의 땅임을 멀리까지 알리는 종탑을 만날 수 있다. 종탑의 4개 면에는 삼위일체상, 예수 부활상,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상, 성 장주기상이 새겨져 본당 공동체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미사가 끝난 성전은 고요하다. 푸른빛 창으로 스며든 빛이 제대 위 십자가를 감싸며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느끼게 한다. 대성당의 십자고상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목장 위 십자가를 본뜬 것으로, 비틀린 구조와 거친 질감이 예수의 고난을 더욱 선명히 드러낸다. 노출 콘크리트 벽과 어두운 배경은 십자가의 의미를 한층 깊게 새겨준다.
성당 문을 나서면 성당이 지어질 당시부터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순례자를 맞는다. 소나기에는 우산이 되고, 뙤약볕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모과나무와 호박 덩굴 등 곳곳의 식물은 신자들이 직접 가꾼 것이다. 신자들의 정성 어린 돌봄으로 자리한 하느님의 집은 단순히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니라, 마음에 평안을 주는 하느님의 정원으로 지역에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