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4년 클레멘스 7세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경당의 제단 후면에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를 의뢰하였고, 피렌체에 머물고 있던 미켈란젤로는 그 작품을 위해서 다시 로마로 왔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을 로마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고 며칠 후에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고 바오로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바오로 3세 교황은 미켈란젤로의 열렬한 후원자로서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미켈란젤로가 회화, 조각, 건축 등의 작품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다른 건축가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지은 성당은 없습니다. 피렌체에서도 산 로렌초 성당의 부속 건물을 설계한 것이고, 마지막 작품인 성 베드로 대성당 역시 여러 건축가에 의해서 수십 년 동안 진행되던 공사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와서 건축가로서 처음 맡은 일은 1538년 캄피돌리오 언덕의 건물과 광장의 설계였습니다. 캄피돌리오는 항상 로마의 정부 청사가 있는 곳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는 세계의 중심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따라서 교황은 로마 제국 권위의 상징인 캄피돌리오를 통해서 현재의 로마가 제국의 권위를 계승하길 원했습니다. 그 시작으로 교황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 동상을 이곳으로 옮기고 미켈란젤로에게 캄피돌리오 광장의 설계를 의뢰한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먼저 광장의 정면에 있는 ‘팔라초 세나토리오’(현재 로마 시청)와 그 오른편에 있는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현재 미술관)를 개축하였습니다. 그리고 팔라초 데이 콘세르바토리와 평행이 아닌 사다리꼴 형태로 마주 보고 있는 ‘팔라초 누오보’(현재 미술관)를 새로 설계하였습니다. 끝으로 이 세 건물로 둘러싸인 타원형의 보도가 있는 광장을 설계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 언덕이 로마의 중심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언덕으로 올라오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르는 길은 계단 형태를 띠면서도 경사로의 느낌을 주어서 편안하게 언덕으로 오를 수 있게 해줍니다. 언덕에 오르고 나면 광장을 만나는데, 사람들은 타원형 모양의 장축 방향으로 이끌려 들어갑니다. 하지만 양옆의 팔라초가 정면에 있는 팔라초 방향으로 벌어진 사다리꼴을 하고 있기에, 타원형 광장에서 느껴지는 급속한 유입감은 정면의 건물로 접근할수록 줄어들게 됩니다.
이 광장의 초점은 일차적으로 팔라초 세나토리오에 있습니다. 광장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팔라초는 단일 소실점을 갖는 투시도의 효과를 내면서 타원형 광장과 함께 사람들을 모아들입니다. 하지만 팔라초 파사드의 양방향에서 올라오는 계단이 건물의 중앙에서 만나 출입구로 이어지고, 이 출입구 위에 종탑을 세움으로써, 양옆 팔라초의 축이 만나는 소실점이 과하게 강조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 고전주의에 따라서 정면의 팔라초를 축으로 하여 양옆의 팔라초를 대칭으로 둠으로써 캄피돌리오 광장에 통일성을 주었습니다. 매너리즘의 경향이 강한 미켈란젤로지만 여기서는 고전주의에 대한 일탈의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고 고대 로마 제국의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또한 세 팔라초의 파사드에 여덟 개씩의 거대 기둥이 반복되도록 하여 ‘ㄷ’자 건물 전체에 총 스물네 개의 거대 기둥이 광장을 둘러싸며 기념비적인 공간을 창출하였습니다. 하지만 1층의 원기둥과 2층 벽감형 창의 작은 원기둥이 거대 기둥과 가지는 관계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범주를 넘어서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시기에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가 설계 후 마치지 못한 두 개의 건축물을 맡아서 완성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팔라초 파르네세’이고, 다른 하나는 브라만테에서 시작되어 라파엘로를 거친 성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 편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켈란젤로 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건축 작품은 로마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문 가운데 하나인 ‘포르타 피아’입니다. 1560년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이 세 점 있고, 1568년경의 판화도 남아 있습니다. 이 문의 형태를 메디치 경당의 벽감형 창과 비교해 보면, 미켈란젤로의 설계가 점점 복잡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르타 피아에서 반고전주의적 특징으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내부 문 상부에 곡선형 페디먼트가 삼각형 페디먼트 안에 있는 형태입니다. 그 아래에는 입구가 줄무늬 홈을 가진 사각기둥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중앙 문 양옆으로 두 개의 창문이 있는데 상부에 팀파눔이 있고, 창문 위로는 블라인드 창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 광장과 다르게 포르타 피아에서는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를 탈피하는 매너리즘을 표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르네상스 예술의 3대 거장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 산치오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모두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건축 분야에서는 세 거장의 위상에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장치나 기계의 설계 같은 지적 탐구 영역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건축물 같은 조형물의 영역에서는 남긴 작품이 거의 없습니다. 라파엘로는 회화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조각상을 만들지 않았고 건축의 영역에서도 투시도 등의 회화적 요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습니다.
반면에 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의 영역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건축 분야에서도 종교적 역사적 기념물에 대해서는 전성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고전주의를 표현하고, 팔라초와 빌라 등에서는 매너리즘의 언어로 반고전주의를 나타내는 등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였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 메디치 가문과의 인연에서 얻은 견문으로, 그의 작품에는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인 인문주의와 플라톤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미켈란젤로는 그의 재능을 소중히 여긴 교황들 곧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와의 깊은 인연으로 로마에, 특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최고의 회화와 조각과 건축 작품을 남겼고, 그 안에 그의 신앙을 담아 아흔 해의 삶을 주신 분께 봉헌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