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처럼 주님의 발자취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을 제외하면, 성지들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순교 터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의정부교구는 조선시대 경기도 일대를 관할했던 양주 관아에서 피로써 믿음을 증거한 무명 순교자 5위의 순교지를 확인했다. 2016년 성지로 선포된 뒤 올해 9월 20일 성당 봉헌식을 마치며 더욱 거룩한 순교의 터전으로 자리매김한 양주 순교성지(담당 최민호 마르코 신부)를 찾았다.
순교자의 선혈을 품다
양주 순교성지는 병인박해 당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다섯 분의 순교자를 기리는 곳이다. 「치명일기」에 따르면 1866년 김윤오(요한)와 권 마르타 부부, 그리고 김 마리아, 박 서방이 순교했고, 1868년에는 홍성원(아우구스티노)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교구는 여러 증언을 통해 ‘순교지’라는 표지석이 있던 땅을 찾아냈다.
볼거리가 풍부한 양주별산대놀이마당과 양주향교로 이어지는 길목에 들어서면, 검붉은색을 띤 아담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양주 순교성지다. 이는 순교자의 선혈을 상징하는 색으로, 순례자의 집과 십자가의 길 그리고 9월 20일 봉헌된 ‘천국 가는 길’ 성당의 외벽은 모두 같은 색이다.
야외 제대 너머 성모 동산에는 ‘가나의 혼인 잔치’를 상징하는 6개의 물동이 항아리 ‘기도 전구함’이 순백의 성모상을 둘러싸고 있다. 이 항아리들은 수원교구 용인 고초골공소에서 가져온 것으로 성당 건축 당시 성인의 유해 대신 기도 카드를 담아 제대 아래 봉헌됐다. 성모상 옆에는 특별 제작된 컵 초가 놓여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때까지의 3일, 즉 72시간 동안 탄다. 순교자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컵 초에는 기도 지향이 담겨 있어, 천상의 제단으로 피어오른다.
십자가의 길은 산화철로 만든 단순하면서도 큼지막한 형태로, 각 처에는 고초골공소에서 가져온 항아리가 자리해 숫자를 표시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15처까지 있어 두 팔 벌린 영광의 예수님도 만날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은 꽃길이라는 의미로 사철 피는 꽃도 함께 심어놨다. 성지에서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순례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특히 매일 오후 3시에는 최민호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봉헌한다.
성지 입구 순례자의 집은 순례자들의 휴식 공간이다. 수십 가지 다양한 성모상과 벽면을 모두 차지한 십자가의 길 수묵화가 눈길을 끈다. 힘찬 필치의 수묵화는 석창우(베드로) 화백의 작품이다.
희생과 인내 끝에 다다를 목적지
‘천국 가는 길 성당’은 성지의 중심에 자리한다. 성당 외관 정면에는 순교자들이 옥에서 썼던 ‘목칼’을 형상화한 커다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다소 두려울 수 있는 고문 도구를 표현했지만, 성당은 그 너머의 희망을 드러낸다. 조형물은 십자가의 길과 같은 산화철이다.
칼 아래는 고난을 넘어 거룩한 내면으로 들어서는 ‘순교의 문’이 있다. 건물 전체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십자가 형태를 띠도록 설계되었다. 양옆에는 제의방과 경당이 자리한다. 지붕은 스페인에서 들여온 석재를 층층이 쌓아 ‘천국의 계단’을 형상화했다.
성전에 들어서면 심순화(가타리나) 화백의 <양주 순교성지 성화>를 마주한다. 이 작품은 성당 설계의 바탕이 된 그림으로, 하늘로 오르는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하단에는 골고타 언덕의 바위가, 좌우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다. 그 안쪽으로 올리브나무 가지를 밟고 천국으로 오르는 순교자들이 표현돼 있다. 송이송이 피어난 작은 꽃들은 곧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상징한다. 한가운데는 이곳 양주 순교성지가 있고, 순교자들이 썼던 칼 역시 그려져 있다.
성당 중앙에는 ‘천국의 문’이 영롱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품고 있다. 요한묵시록 21장 21절의 “열두 성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있다는 구절을 형상화한 것이다. 상단에 놓인 열두 개의 연노랑 유리는 진주처럼 반짝이며 천상의 문을 상징한다.
방주에 실려 엿본 하느님 나라
‘천국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룩한 공간이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세속과 구분된 이곳에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내부는 마치 커다란 배 안에 들어온 듯 아늑하면서도, 하얀 대리석과 따뜻한 목재의 조화가 다채롭게 어우러진다. 실제로 성당 내부는 노아의 방주를 묘사했으며, 순백의 제단 부분은 ‘예수 부활 성당’을 본떠 예수님이 운전하는 ‘천국 가는 배’를 나타낸다.
좌석은 총 144석으로, 요한 묵시록(7, 1-8)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 중 뽑힌 14만4000명을 상징한다. 12와 12를 곱한 수가 그 의미의 바탕이다. 12는 곧 열두 제자를 뜻한다. 그래서 각 의자에는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문양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첫 줄의 문양은 성 베드로를 뜻하는 ‘천국과 지상의 열쇠’다.
제대 뒤 감실에는 성모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이를 감싸는 벽은 성령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졌다. 이곳은 최후의 만찬이 열린 장소이자 성령이 강림했던 ‘다락방’을 상징한다. 야외 제대 뒤 성모상을 떠올리게 하는 배치다. 또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담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돼 있다.
성당 안에는 꼭 들러야 할 비밀 공간이 있다. 왼편 경당이다. 천장이 비스듬히 낮아지도록 설계된 경당에 들어서면 동굴 같은 엄숙함이 감돌며, 고요히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천장에 새겨진 삼위일체 부조의 위엄 있는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성부의 손, 성자의 성체, 빛이신 성령이 벽의 경계를 넘어 순례자에게까지 흘러든다.
경당 오른쪽 벽에는 한국교회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비롯해 세계 유명 성인과 가경자 최양업 신부 등이 그려진 유리화가 빛을 발하고 있다. 순례자들은 제대 위에 현시된 성체를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다. 제대 왼쪽에는 성모상과 기도 초, 기도 카드가 고요함 속에 봉헌돼 있다. 성당과 경당 구석구석 스테인드글라스, 유리화에는 최성호(루카) 작가의 손길이 닿아있다.
다시 천국 가는 길 성당의 ‘천국의 문’과 ‘순교의 문’을 차례로 나선다. 목숨 바쳐 하느님을 증거했던 순교자들 덕에 하느님 나라를 살짝 맛본 환희의 마음을 안고.
◆ 순례 길잡이
- 주소: 경기 양주시 부흥로1399번길 62
- 미사: 매일 오전 11시(월요일 제외)
십자가의 길과 하느님 자비의 5단 기도: 매일 오후 3시(월요일 제외)
- 문의 : 031-841-1866 성지 사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