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요즘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온갖 말이 넘쳐나지만, 권위 있는 말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말의 힘과 권위는 언행일치에서 온다. 말에 권위가 없는 것은 말에 행동과 삶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없는 말은 그저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삶을 통한 가르침
사막 교부들에게는 말보다 실천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삶의 모범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스승은 제자를 받아들인 후에도 침묵을 지켰다. 가능하면 제자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단지 ‘네가 보는 바를 행하라’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압바 오르는 “가서 내가 행한 바를 본 대로 행하십시오.”(오르 7)라고 말했다. 압바 테오도루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명령을 내리기 위해 공동체의 장상이 되었단 말인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자가 원한다면, 그는 내가 하는 것을 보고 행하리라.”(익명의 압바 373)
제자는 스승과 함께 생활하면서 스승의 말보다도 그가 사는 모습을 보고 배웠다.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많은 방문객이 단지 그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기쁨에 가득 찼고, 충분히 선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안토니우스를 방문했던 한 형제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부님, 저는 당신을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익명의 압바 27) 안토니우스는 사막에서 일종의 등대가 되어 수많은 이를 다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삶을 통한 가르침이 낳은 열매이리라!
삶의 모범
사막에서 스승은 입법자도, 법 전달자도 아니었다. 그는 삶의 모범이었다.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몇몇 형제가 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책임자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원로가 말했다. ‘아니요, 다른 무엇보다도 형제의 일을 하십시오. 그들이 형제처럼 살고 싶다면 스스로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 형제가 원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사부님, 그들은 제가 책임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원로가 그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들의 입법자가 아니라 모범이 되십시오.’”(포이멘 174)
스승은 말보다는 삶의 모범으로 더욱 스승이 된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스승은 일종의 모범이지 법 전달자가 아니다. 그는 자기 말로써 규칙이 되지만, 그보다는 자기 행동으로써 더욱 확고한 규칙이 된다. 펠루시움의 압바 이시도루스가 말했다. “말없는 삶이 삶 없는 말보다 더 낫습니다. 침묵하며 감화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리치며 방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과 삶이 서로 부합할 때 온갖 철학(금욕 생활)을 형성할 것입니다.”(펠루시움의 이시도루스 1)
행동과 모범으로 가르치고 제자와 함께 생활한 교부들
권위 내세우거나 명령하지 않고 침묵하며 솔선수범하는 모습
깊이 있는 인격이 스승의 조건
삶으로 받은 가르침
필자에게는 삶으로 가르침을 받은 경험이 몇 번 있다. 두 경험이 특히 인상적이었고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하나는 1990년대 초 양성기 때, 파코미우스의 생애를 읽었을 때였다. 거기서 접한 몇몇 일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파코미우스는 ‘코이노니아’라는 거대한 공동체 전체의 영적 사부였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형제와 똑같이 규칙을 준수했다. 코이노니아에 속한 각 수도원을 방문하면 그곳 형제들과 똑같이 기도하고 노동했으며, 식사 배식을 받기 위해 형제들과 같이 줄을 섰다.
어느 날 파코미우스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파코미우스를 방문한 테오도루스가 스승이 다 낡은 담요를 덮고 있는 모습을 보고, ‘빨리 새 담요를 가져다 덮어드리라’고 수사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파코미우스는 테오도루스에게 “그대는 형제들 중 누가 아플 때 그를 방문해 본 적이 있느냐?”며 이를 만류했다. 이처럼 파코미우스는 장상으로서 어떤 특권을 누리거나 예외를 두지 않고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규칙을 준수하고자 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유학 중이던 1999년, 여름 방학을 프랑스의 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지낼 때였다. 당시 이 공동체의 아빠스님은 필자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모습과 모범적인 생활은 신선한 충격 자체였다. 장상이었지만 권위적이라든지 엄격하고 요란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늘 조용하고 온화하면서도 위엄이 있었고, 소박하고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공동체 안에 깊이 현존하는 분이었다. 아빠스의 모관도 쓰지 않았고, 나무로 된 소박한 목장(牧杖)과 평범한 반지와 목 십자가가 전부였다. 겉으로 봐선 다른 형제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곧 공동체가 이분을 중심으로 굳게 결속돼 있음을 느꼈다.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친구 수사의 다음 말을 듣고 궁금증이 풀렸다. “우리 아빠스님은 형제들이 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하셔!”
실제 식사 후 설거지며, 형제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공간 청소며, 본인이 할 시간과 여건이 되면 뭐든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을 보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형제들 모두 이를 평범한 일처럼 여기는 모습을 보고서였다. 그의 이런 솔선수범과 모범이 바로 공동체 일치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승을 갈구하는 시대
우리 시대는 어찌 보면 스승이 필요한, 아니 스승을 갈구하는 시대 같다. 우리에게는 본받을 모범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어디서 스승을 찾아야 할까? ‘삶이 말을 한다’고 한다. 이것이 참된 스승 식별의 1차 기준일 것이다.
주의하지 않으면 자칫 속기 쉽다. 요란하고 현란한 말로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려는 자는 흔히 짝퉁일 경우가 많다. 내적으로 공허하고 내실이 없을 수 있다. 말이나 외적인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봐야 한다.
우리가 본받을 스승은 잘 보이지 않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 숨어 있다. 그런 사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 일상 안에, 내 주변을 잘 보면 분명 화려하고 떠벌이진 않지만, 삶과 인격에 깊이가 묻어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잘 못 볼 뿐이다.
삶으로 말하는 사람은 타의 지표가 된다. 우리도 삶으로 말하려 노력할 때 그러할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