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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일곱 대접의 외침(묵시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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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묵시록 15장부터 일곱 대접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앞서 일곱 나팔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흐름을 보여주는데, 땅으로부터 시작한 대접은 바다와 강 그리고 해와 관련해서 쏟아지고, 나머지 세 개의 대접은 악의 세력을 징벌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일곱 나팔 이야기에서도 첫 네 개의 나팔과 이어지는 세 개의 나팔이 구별되어 서술되었다. 


일곱 나팔의 이야기에서 살펴봤듯이 일곱 대접 이야기의 근저에는 탈출기가 말하는 구원의 가치가 스며들어 있다. 두 개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세부적 표현들은 다르나 서로 다른 주제를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가치를 달리 표현하는 두 개의 해설인 셈이다.


일곱 대접의 이야기는 하늘에 나타나는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으로 시작된다. 하늘의 ‘표징’이라는 단어는 요한 묵시록 12장 1절부터 3절에서 여인과 용을 가리키기도 했다. 용의 위협 속에서도 여인으로 상징되었던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보호 아래 구원의 여정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하늘의 표징이란 말마디가 암시한다.


 일곱 대접의 시작에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이어지는 사사의 내용이 비록 두렵고 위협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구원의 길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곱 대접의 마지막에서 하느님의 심판이 성취되고 있고 이어지는 17장에서는 악의 최종 상징인 대탕녀 바빌론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어 하느님의 구원은 막힘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우린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의 구원이 악의 세력이나 그 위협 속에 전개되는 것은 요한 묵시록이 보여주는 서사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 서사의 특징은, 현실이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편하고 안락한 현실을 보상받는 것으로 구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일깨운다. 현실의 고통을 하느님 심판의 자리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고통을 피하기보다 오히려 정확히 그 고통에 직면하는 신앙의 결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고통 속에서 신앙의 본질은 더욱 도드라진다는 것이고 구원은 그런 신앙을 지닌 이들이 누릴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요한은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위에 서 있는 승리한 이들을 본다. 유리 바다는 하늘 창공 속의 물을 가리킨다고 여기는데, 문제는 ‘불’이다. 대개는 하느님의 현현(묵시 4,5 참조)이나 정의로운 개입(묵시 1,14; 8,5 참조)으로 해석하면서 얼마간의 징벌적 의미가 ‘불’이라는 단어에 스며들어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3절에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탈출기에 나타나는 홍해 바다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위에 승리한 이들이 서 있는 관계로 옛날 히브리 민족이 노예에서 해방을, 죽음에서 생명을 향해 걸어간 하느님 구원의 여정이 바로 불이 섞인 유리 바다가 가리키는 것이라고.


승리자들은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찔렀다. 짐승은 로마의 권력을 가리켰고 그 상과 그 이름은 두 번째 짐승, 그러니까 첫 번째 짐승인 로마의 힘을 경배하게 만든, ‘현실 논리’의 거대한 힘이라고 앞선 글들에서 언급했다. 로마는 건재했고, 그 힘은 대단했으며, 신앙인은 그 대단한 힘의 현실 논리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무찌른 것’은 없었다. 무찌를 수도 없었다. 승리자는 그러므로 현실 앞에서는 패배한 것처럼 여겨졌다. 
 


불의하고 불편한 현실에서
안락한 보상 얻는 것으로
구원 이해해서는 안 돼
고통 직면해 주님 뜻 구해야


그럼에도 그들이 승리자로 스스로 여긴 것은 ‘수금’을 들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금’과 ‘노래’는 다분히 전례적이다. 현실의 실패는 전례를 행하는 신앙인들의 무리 속에서 승리의 찬가로 탈바꿈한다. 힘든 삶은 전례를 통해 끝내 극복되어야 한다는 다짐이 승리자들의 노래다. 요한 묵시록을 읽고 또 읽은 그 시대의 신앙인은 그렇게 하느님을 찾으며 현실을 버텨나갔다.


수금을 타며 부른 노래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다. 모세를 통해 히브리 민족의 탈출을, 어린양을 통해 십자가의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를테면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는 구원의 기쁨을 경축하는 노래다. 노래 안에 하느님은 주님이시고 또한 임금님으로 소개된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크고 놀랍다.(탈출 15,11; 시편 92,6; 11,2 참조) 하느님은 정의롭고 참되시다.(신명 32,4; 시편 145,17 참조) 하느님은 모든 민족의 임금이시다.(예레 10,7 참조) 하느님 앞에 모든 민족이 와 경배할 것이다.(시편 86,9-10; 말라 1,11 참조)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는 온통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는 구약의 전통으로 꾸며져 있다. 승리자들의 노래는 자신의 승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을 승리로 해석한 것이다.


신앙인의 승리는 맞서야 할 상대를 꺾어 누리는 것이 아니다. 옳지 못한 이들, 불편한 이들을 비난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 신앙인의 승리다. 맞서야 할 상대나 상황이 있다면 오히려 구원의 길을 묻고 사유하며 추구하는 기회라 여기는 것이 신앙인의 승리다.


5절에 증언의 천막 성전이 열린다. 증언의 천막 성전은 히브리 민족이 거쳐온 광야를 떠올리게 한다. 척박한 광야에서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그 천막은 암시한다. 우리의 본문은 천막이란 단어에 바로 이어서 성전이라는 단어를 연결하고 있다. 광야의 천막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후 솔로몬에 의해 지어진 성전과 하나 된다. 


광야든, 가나안의 복지(福地)든, 하느님은 그분의 백성과 늘 함께하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 그 천막 성전에서 빛나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있는 일곱 천사가 등장하는데, 다분히 천상의 구원을 상징하는 차림새의 천사들이다. 그 천사들이 하느님의 분노가 가득 담긴 금 대접을 들었을지라도 천막 성전이라는 하느님 현존의 공간에서 구원의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천사들이 쏟아 놓을 일곱 재앙이 끝날 때,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이 가득한 성전에 비로소 우리는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묵시 15,8; 21,3 참조) 일곱 재앙이 강력할수록 구원을 향한 발걸음은 더욱 힘찬 것이 된다. 일곱 대접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그러므로 구원의 길을 재촉하는 큰 외침일 수밖에 없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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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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