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당시 75살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암 수술을 받는다는 것을 자식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내가 그 사실을 안 날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리는 학회에 떠나기 전날이었다. 놀라서 전화했더니, 아버지가 태연하게 말했다.
“걱정할까 봐 알리지 않았다. 당장 죽어도 무슨 여한이 있겠니? 아빠는 참 재미있게 잘 살았어.”
내가 “아무래도 나 내일 캐나다행 포기할까 봐요”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니. 너는 젊고 너의 일을 해야 해. 우리 지난 주말에 만나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지? 그걸로 충분해. 아빠는 늙었으니, 아빠의 길을 가고, 너는 젊었으니, 너의 길을 가야 한다. 다시 만나게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절대로 후회하거나 슬퍼하지 말거라.”
전화를 다 마치지 못하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아버지와 헤어질 수 있다는 슬픔이 처음으로 실감 나서였지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품격을 잃지 않으시는 것에 대한 감동도 있었다. ‘나도 죽음의 자리에서 자식들에게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꼭 그래야지’라는 생각이 동시에 났다.
학회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암 수술을 잘 마치시고 그로부터 20여 년을 더 사신다. 그리하여 엄마의 회심에 따라 세례를 받으셨고, 두 분은 저녁마다 함께 앉아 묵주기도를 바치셨다. 아버지를 존경하던 후배 7쌍이 아무런 의문도 없이 같이 가톨릭에 입교하는 기적도 일어났다.
건강해지신 아버지는 아빠가 없는 우리 아이들의 생일마다 꼭 찾아오셨다. 완전한 정장을 입으시고, 아이들의 생일 케이크를 함께 자르신 아버지는 어느 날 말했다.
“미카엘라, 가브리엘, 라파엘, 기억하거라. 할아버지가 너희들 생일을 위해서 넥타이를 매고 좋은 옷을 입고 왔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지난주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유언으로 아직 입교하지 않은 외아들인 오빠에게 말했다. “네가 나 죽은 후에 신자가 되면 미사를 봉헌해다오. 하지만 신자가 되지 않으면, 그냥 ‘아베 마리아’ 음악을 틀어 내 기일을 기려다오.”
아버지는 평생 그랬듯, 자식들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셨던 거다. 내가 큰일을 겪을 때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이혼하는 게 정말 싫다. 하지만 네가 불행한 건 더 싫어.”
임종 자리에서 나는 아버지의 식어가는 손을 붙들고 말했다. “하느님이 내 인생에서 베풀어주신 가장 큰 은총이자 행운은, 날 아빠 딸로 만드신 거야.”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아버지는 엷게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묵주와 작은 십자가를 쥔 채로 세상을 떠나가셨다.
후배 하나가 전화 통화 중에 말했다. “언니는 좋겠다. 그런 아버지가 있어서. 우리 아버지는 주로 내 자존심을 짓밟는 역할을 하고 가셨지.”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은총이고 행운이라 했잖아. 우리 아버지도 그런 아빠가 없었어. 하지만 그런 아빠가 되었잖아. 그러니 너도 그런 아빠 그런 엄마가 되면 되지. 그것도 힘들면, 우선 너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돼. 그것도 행운이야.”
나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을까. 이 남은 시간들, 나도 다른 이들에게 행운이 되고 싶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