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로 인한 고통은 여성과 태아만 짊어지는 것이 아니다. 곁을 지키는 남편, 가족 모두가 생명을 저버리는 잘못된 선택 이후 이어지는 아픔에 동반하게 된다. 낙태는 미혼 여성뿐만 아니라, 여러 상황을 이유로 일반 가정에서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박프란치스코(가명)씨가 9월 25일 국회 잔디밭에 앉아 본관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보호자 동의 없는 낙태 수술로 둘 째 아이를 잃었지만, 낙태죄 후속 입법 부재로 어느 곳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막막함을 털어놨다.
“내 아이를 찾습니다”
박 프란치스코(가명, 44)씨는 “2023년 10월 13일, 아침까지만 해도 있던 아이가 저녁이 되니 없어졌다”고 말했다. 부부싸움을 한 아내가 말도 없이 하루 사이에 낙태를 하고 온 것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박씨와 아내는 새 생명이 찾아온 것에 뛸 듯이 기뻐하며 출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산부인과를 찾아 산전 진료도 받고, 아이를 만날 날만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
박씨는 “아내 말을 듣고 처음엔 믿을 수 없어 곧바로 응급실부터 데려갔다”며 “초음파를 통해 아이가 더 이상 없는 것을 알게 된 그 때부터 억장이 무너져내리고 있다”고 밝혔다.
박씨는 한 대학병원의 신경외과 의사다. 그렇기에 낙태와 같은 큰 수술을 보호자 동의 없이 행한 병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병원을 찾아 진료기록과 병원 측 입장을 물었지만, 달려온 경찰에 쫓겨날 뿐이었다. 결국 그는 그해 11월 21일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의료법에 따라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과 숙려기간을 제공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점, 낙태 수술을 하면서 보호자 동의를 받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형사소송은 당시 낙태죄 처벌 조항이 효력을 잃은 상태라 진행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심은 일부 승소, 2심은 패소였다. 마찬가지로 낙태죄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배상을 인정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2021년 낙태죄 처벌조항이 효력을 잃은 이후 충분히 예상 가능한 피해 상황을 박씨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지적은 판결문에도 나온다. 담당 판사는 박씨의 2심 판결문에서 “이 사건 태아와 원고 ‘박씨’의 권리를 보호하는 입법적 수단은 매우 다양하고, 어느 수단을 선택할 것인지는 우선 입법자의 권한에 속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직접적인 법적 근거가 없는데, 재판부가 확대 해석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의사의 의료행위에 대한 자유를 침해할 수도 없다”고 했다. 박씨는 “저도 의사이지만, 이렇게 당사자 뜻만 갖고 쉽게 생명을 살해하는 이들을 같은 의사로 여기고 싶지도 않다”며 “2019년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헌재가 내 아이를 죽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의 권리는 어디에
입법부에 대한 분노도 일었다. 헌재는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2020년까지 후속 입법을 주문했지만, 입법자인 국회의원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 탓에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낙태는 무법지대 속에 행해지고 있다. 박씨는 “대법원 상고까지 하고 싶었지만, 셋째 아이가 태어났다”며 “사실 2심까지는 승산이 없어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우리 아이를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버텼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고 고개를 숙였다.
대신 박씨는 입법 부작위로 헌법소원을 청구할 예정이다. 입법 부작위란 ‘입법자가 헌법상 입법 의무가 있는 어떤 사항과 관련하여 전혀 입법하지 않아 입법 행위에 흠이 있는 경우’를 이른다. 입법자들이 낙태죄 후속 입법을 2020년까지 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아 아이를 잃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순탄치는 않다. 1심부터 지금까지 변호사 구하기도 쉽지 않았던 터였다. 변호사들은 뒤에서 짜기라도 한 듯 승소 가능성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생명 앞에서 법도, 법조인들도 모두 고개를 돌리는 형국에 그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박씨는 “소송을 준비하는 내내 주변으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만 들었다”며 “우리 사회도 육아는 ‘공동육아’라고 외치면서 임신과 출산·낙태에 대해서는 유독 왜 여성 입장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손가락질할까 봐 이런 고충을 꺼내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스스로 낙태한 아내마저 떠나간 둘째 이야기만 나오면 울고불고 ‘절에 위패라도 세우자’고 하는데, 이게 바로 헌재가 말하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냐”고 되물었다.
박 프란치스코(가명)씨의 아내가 낙태 수술을 위해 병원에 연락하자 돌아온 답변이다. 박씨 제공
들리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박씨는 아내의 낙태 사실을 안 뒤 거의 석 달 동안은 손이 떨려 수술도 집도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낙태 수술을 행한 병원으로부터 ‘선생님처럼 보호자 항의는 수도 없이 받았다’는 말만 반복해 들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낙태로 고통받는 대상은 여성뿐만 아니라 생명을 지지했던 남성, 가족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이를 겪은 남성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일 뿐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호소했다.
아울러 “낙태가 임신·출산과 함께 여성들만의 자기결정권 영역에 해당한다면, 아이 아빠들은 당당히 뱃속 아이를 ‘우리 아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라면서 “국방·납세의 의무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왜 아빠로서 내 아이의 생존권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아빠의 행복 추구권은 보장받지 못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계속 지난 뱃속의 아이를 떠올렸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죽은 우리 아이가 다시 살아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저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가진 우리 아이의 ‘아빠’입니다.”
법률사무소 Y의 연취현 변호사는 국회 학술 세미나 ‘낙태에 있어서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에서 “현재 더불어민주당 남인순·이수진 의원이 발의한 모자보건법 개정안들은 여성의 결정만으로 태아를 무제한 낙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이는 임신과 출산이 남성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배제하는 처사로, 수많은 가정 내 갈등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연 변호사는 “배우자 동의를 전면 배제하기보다 공동 책임을 강화하는 제도로 보완해야 한다”며 “단 부득이한 경우 여성의 단독 결정 가능성을 열어두되, 원칙적으로는 부부 공동책임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아·여성보호국민연합은 9월 25일 국회에서 ‘낙태에 있어서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학술 세미나를 마련했다.
전문가들이 본 낙태죄 후속 입법 방향성
9월 25일 국회 학술 세미나에서는 낙태죄 후속 입법과 관련해 △임신 주 수 제한 명문화 △의무적 상담과 숙려기간 제도 도입 △위기임산부에 대한 사회적 지원 체계 강화 △임부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 등 의학적 불가피성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낙태에 건강보험 적용 △낙태 전 의료인의 충분한 설명 의무 △의료인의 양심적 거부권 인정 △지정 의료기관 제도 도입으로 무분별한 낙태 예방 등 다양한 제언이 나왔다. 헌법재판소의 2019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낙태 전면 금지는 불가능한 상태. 이에 전문가들은 헌재의 결정을 바탕으로 태아의 생명을 그나마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저마다 내놨다.
음선필(홍익대 법과대학) 교수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보호는 일차적으로 모체인 임신부에 의해 이뤄지며 또한 이뤄져야 하는 것이 자연법의 요구”라며 “헌법은 이 같은 자연법의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모성 보호’를 국가 의무(제36조 2항)로까지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는 모성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 교수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흔히 낙태를 합법화하는 명분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 출산을 선택하는 여성을 위한 권리도 포함하고 있다”며 “낙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상담이 전문성·중립성·신중성과 숙려 기간의 충분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상담 의사와 시술 의사를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했다. 자칫 상담이 형식적으로 전락해 ‘상담 사실 확인서’가 이른바 ‘낙태 허용 문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아·여성보호국민연합이 9월 25일 연 ‘낙태에 있어서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국회 학술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이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자'는 취지의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엄연한 생명체
“이 아이는 사람 같습니까?” 홍순철(고려대 산부인과) 교수는 세미나 청중들에게 태아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임신 10주차의 작은 태아 사진이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그 작은 몸에서 어디가 얼굴이고 팔·다리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태아가 ‘사람’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홍 교수는 “태아는 엄마에 의존하지만, 엄연히 별개의 생명체”라며 “태아는 임신 10주만 돼도 엄마 뱃속에서 운동도 하고, 손가락을 빤다”고 했다. 이어 “태아는 14주엔 호흡하고, 24주엔 외부 소리를 들으며, 28주에는 바깥이 어두운지 밝은지도 구분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태아가 운동한다는 건 감각 신경이 발달했다는 의미”라며 “낙태 과정에서 태아는 그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비명도 지르지만, 그것이 바깥에 전달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이를 통해 “모성과 태아·영유아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출산과 양육을 도모하는 법인 모자보건법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여기에 반대되는 어떠한 내용도 포함돼서는 안 된다”며 “낙태를 일부 허용하는 조항은 모자보건법에서 형법으로 옮기고, 약물 낙태 도입 등이 논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 차희제(토마스) 회장은 “최근 21주에 태어난 이른둥이들의 생존 보고가 이어지고 있는데, 전면 낙태 허용은 말도 안 되는 처사”라며 “당장 낙태 허용을 전면 반대해야 하지만, 헌재 결정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주 수별 허용 사유를 따로 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일반적으로 심장이 뛰기 전인 6주까지만 허용(심장박동법)하고, 부득이하게 산모의 건강이 위험할 때는 22주까지 허용하는 방안이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비교적 안전한 시기인 임신 10주 이내를 내놨다.
차 회장은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낙태는 반드시 금지돼야 한다”며 “대신 예상치 못한 임신 또는 미혼부모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지원을 추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의사는 누구나 양심에 따라 원치 않을 경우엔 낙태와 관련된 어떠한 일이나 과정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는 의사를 포함한 모든 의료인의 기본권이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