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 사는 샤론씨는 27살이 되기까지 여러 번의 낙태를 했다. 싱가포르의 세이프 플레이스(Safe Place) 대표 제니퍼 헝 목사는 “샤론씨는 똑똑하고 아름다우며, 미래도 보장된 여성이었지만 늘 두려움의 악순환에 갇혀 있었다”고 전했다. ‘더 이상 낙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땐 이미 늦었다. 잦은 낙태로 몸이 망가져 유산이 거듭된 것이다.
헝 목사는 9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태아·여성보호국민연합 주관 학술 세미나 ‘낙태에 있어서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에서 위기임산부를 도우며 마주한 낙태 피해자들 사례를 소개해 이목을 끌었다 ‘엄마의 강요로 낙태했지만, 결국 의절하고 자살을 고민하는 여성’ ‘낙태 후 정신과 치료를 받는 여성’ 등 사례도 다양했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헝 목사는 “앤디씨는 처음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했지만, 여자친구는 낙태를 택했고, 그는 침묵 속에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부모로서 태중의 아이를 잃는다는 것은 남성에게도 큰 고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낙태가 여성만의 일인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통념 속에 남성들은 어디에도 답답함을 호소할 곳이 없다.
낙태는 헌법재판소가 2019년 낙태죄 처벌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기 전부터 음지에서 행해져 왔다. 그리고 후속 입법 시한이 지나 사실상 낙태죄가 폐지됐고, 이후에는 임신 36주 태아까지 900만 원에 낙태되는 등 낙태 행태가 더욱 만연했다. 국회의 입법 태만으로 우리 사회에서 낙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는 최근 공식 통계도 없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최초 조사인 2005년에는 34만 건이었고 2010년에는 약 17만 건으로 보고됐다. 낙태가 불법인 시기 조사된 지표라, 이 또한 정확성을 담보하긴 어렵다. 다만 202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15~44세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 36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낙태 후 자궁내막증·습관성 유산 등 신체적 증상을 겪는 경우는 7.1, 죄책감과 자살 충동 등 정신적 증상을 겪는 이는 59.5에 이르렀다.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괜찮다’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것을 안다’는 등 주변에서 위로를 받기도 했지만, 현실은 너무 달랐다”며 ‘낙태 피해 사실’을 밝혔다.
박예슬 기자 okkcc8@cpbc.co.kr
박주현씨는 10년 전 자신과 같이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다며, 어렵사리 얼굴 공개를 결정했다.
낙태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레지나의 고백
낙태 여성의 호소 “어떤 상황에서든 생명을 선택하세요”
본지는 오랜 기간 낙태의 고통 속에 살다가 비로소 새 삶을 사는 한 여성을 만났다. 그는 10년 전 자신처럼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박주현(레지나, 34, 인천교구 청학동본당)씨 증언을 1인칭으로 재구성했다.
낙태는 명백한 오류이고 거짓이며 악입니다
“지옥 같은 삶을 보냈습니다. 낙태는 명백한 오류이고, 거짓이며, 악입니다. 2015년 2월 21일이었어요. 임신 5~7주차였고요. 임신 사실은 그해 2월 5일에 알았어요. 규칙적이던 생리를 하지 않아 테스트해보니 임신이었습니다. 당시 24살, 대학생이었죠.
3년을 만난 남자친구는 임신 사실을 알고 기뻐했어요. 남자친구 부모님도 결혼을 지지해주셨죠. 그러나 저는 아니었습니다. 교만하게도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이 친구가 정말 제 배우자가 맞을까’ 의심했고, 무엇보다 진로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취업 고민도 깊었고, 자아실현을 하고 싶었어요. 당장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제가 꿈꾸던 모든 것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이 깊진 않았습니다. 사실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아요. 그래도 엄마를 따라 미사에 종종 참여하곤 했습니다. 청년 기도 모임에도 나갔었고요. 아이러니하게도 낙태에 대한 제 고민을 알고 병원을 소개해주신 분도 수녀님이셨어요. 그분은 제게 ‘레지나, 괜찮아. 내 친구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어. 그 친구는 지금도 잘 살고 있어. 그렇게 큰 일이 아닐지도 몰라’라고 하셨죠. 큰 위로를 받았고, 낙태를 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그렇게 찾아간 병원에선 의사도 묻더군요. ‘우리 병원은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요. 당시엔 낙태가 불법이었으니까요. 그저 ‘지인이 이곳에서 수술했다고 해서 소개받고 왔어요’ 정도로 둘러대니, 의사는 헛웃음을 지었어요. 자신의 병원이 ‘낙태 병원’으로 알려졌다니 당황하는 모습이었죠.
남자친구가 울면서 말렸지만
남자친구는 울면서 말렸어요. 그러나 제가 아이를 가진 상황이었으니, 더는 아무 말도 못했던 것 같아요. 하염없이 울던 그의 모습이 기억나요.
낙태 비용은 1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수술 당시 충격이 워낙 커서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데, 저녁이었어요. 수술 직전까지 혼란스러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병원 관계자들에게 말했고, 미루고 미루다 저녁 마지막 수술로 낙태했습니다. 수술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던 것 같아요. 다만 마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배가 너무 아파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선명해요. 어찌어찌 회복하고 당일 퇴원했는데, 차마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는 갈 수가 없었어요. 부모님도 낙태 사실을 알고 계시긴 했지만, 저의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진 않았습니다.
‘앗,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뱃속에 분명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가 그럼 죽은 건가?’ 제정신이 든 건 남자친구 집에 도착해 침대에 앉은 순간이었어요. 그 순간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번뜩 든 거죠. 제가 행한 사실을 되짚었을 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감정이 밀려왔어요. 수없이 고민했지만, 낙태를 선택한 것은 저였잖아요. 그 순간 깨달았어요. ‘완전히 잘못된 선택을 했구나! 내 아이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거구나!’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남자친구에게 ‘시간을 되돌려달라’며 엉엉 울었어요. 스스로 낙태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기에, 아이 존재를 인식하지 않으려 노력했거든요. 그럼에도 생명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그 상실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여자대학교에 다녔습니다. 여성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고, 관련 수업을 열심히 찾아 듣기도 했어요. ‘낙태는 여성의 권리다’ ‘내 몸의 권리는 나에게 있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여성 인권에 대한 시야도 널리 열려있다고 자부했어요. 가톨릭 신자로서 부끄럽지만 ‘결혼은 하더라도 나의 경력을 위해 아이는 낳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갖고 있었죠. 그런데도 낙태한 뒤 느껴졌어요. 제 아이는 생명이었다는 것을요. 제 몸에 붙어 있는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나와 똑 닮았을 생명이었다는 것을요.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엄마였기에 잘 알 수 있었어요.
후유증과 폐인같은 삶
낙태 후 한동안은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아기가 나오는 기저귀 광고만 봐도 마음이 아팠어요. 후유증도 생겼어요. 하반신 위주로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 나타났어요. 바람만 스쳐도 칼이 닿는 아픔이 느껴졌어요. 원하던 공부와 직업을 위해 매진하기는커녕 병원 말곤 집 밖을 못 나갔어요. 대학병원에서 ‘외상을 겪고, 잘못됐을 때 이런 후유증이 온다’는 설명을 들었어요. 생명을 지운 벌로 몸과 마음 모두 지옥이 됐어요. 그 고통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남자친구는 그래도 계속 함께하길 원했지만, 더 이상 만날 수 없었어요. 결국 관계도 끝났고, 저는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한 채 더욱 깊은 우울의 늪에 빠졌어요. 부모님이 외출한 사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요. 하루하루가 자살 충동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사실을 털어놨을 때, 독실한 개신교 친구가 나섰어요. 저를 계속 교회에 데려갔죠. 처음엔 목사님 말씀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어느 날 ‘그래,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자 기도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냥 원망하듯 하느님께 ‘당신이 정말 있다면, 나 진짜 오늘 내일 죽을 것 같으니까 좀 살려 봐!’라고 소리치며 기도했던 것 같아요. 이후엔 초자연적 현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도하다가 온몸이 경련하고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상황을 경험했어요. 그때 ‘그래도 하느님이 있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박주현씨는 10년 전 자신과 같이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다며, 어렵사리 얼굴 공개를 결정했다. 교회 안에서 신앙 활동을 이어가는 그(맨 앞줄)의 모습이다. 박주현씨 제공
믿음과 극복
신앙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아픔을 점점 극복해 나갔습니다. 특히 간음한 여자가 붙잡혔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고 하신 구절에서 큰 위로를 받았어요. 신앙을 갖고도 주기적으로 꿈을 꿨어요. 집에 누군가를 묶어두고 저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는데, 집에 묶어둔 사람이 생각나 자꾸 불안해하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지난해 교회가 마련한 생명대행진에서 제 아픔을 처음 밝히고 난 뒤 더 이상 꾸지 않게 됐어요. 주변 사람들은 제 이야기에 정말 놀랐고,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백을 통해 회복되는 것을 느꼈어요.
실제 같은 고민을 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차마 ‘내가 낙태해봤다’는 말을 못해 어떻게 설득했느냐 하면, ‘아이 클 때까지 내가 같이 책임져줄게. 월급 일부를 너한테 줄게. 그렇게라도 말리고 싶어’라고까지 이야기했어요. 그러나 그 친구는 결국 저와 같은 선택을 했죠. 저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았거든요. 그 친구의 남자친구는 아이를 책임지지 않으려 했고 결국 친구도 최악의 선택을 했어요. 이후 그 친구는 미혼 상태에서 또다시 임신했는데, 그때는 아이를 낳았어요.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 친구가 낙태를 해보니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후회되는 선택이었는지 깨달았던 것 같아요. 몸속 아이가 생명이라는 사실은 신앙과 관계없이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아니다’라고 해도 말이죠.
낙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10년 전의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낙태는 명백한 오류이고, 거짓이며, 악이라는 것을요. 같은 고민과 아픔이 있는 분들이 얼마나 두렵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지 압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이든 생명을 선택하세요. 제 모든 것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과 자녀의 삶에 함께하실 것이며, 분명 돌봐주시고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또 낙태를 택한 분들이 얼마나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압니다.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그분을 꼭 붙잡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눈보다 하얗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분께 요청하고 싶습니다. 낙태를 고민하는, 낙태를 선택한, 어렵게 출산을 결정한, 혼전 성관계의 유혹을 받고 있는 모든 상황에 처한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죽음과 같던 제 삶을 구원해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