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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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일곱 대접의 호소(묵시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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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것을 두고 잘못한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징벌이나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곱 대접의 이야기는 성전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로 시작한다. 구약성경 도처에서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한 것이 ‘큰 목소리’(시편 69,25; 예레 10,25; 42,18; 44,6 참조)다. 하느님의 개입이 재앙으로만 읽히는 건 슬픈 일이다. 일곱 대접이 쏟아져 벌어지는 현상이 참혹할지라도, 그 재앙이 가리키는 바가 이 땅의 멸절이나 파괴라는 사실로만 읽힌다면,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은 폭력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건 참 슬픈 일이다.


대부분의 성경 해석이 그렇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 사고에 갇혀 해석될 때가 많다. 잘못하면 하느님은 벌을 주시는 분으로 규정하고, 잘 살았다 싶으면 하느님으로부터 큰 상을 당연한 듯 기대하는 신앙은 얄팍한 상술(商術)과 다르지 않다. 일곱 대접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것이 인간의 악행에 따른 결과론적 징벌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판단으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이사 55,8 참조)


첫 번째 대접이 쏟아졌을 때,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에 경배한 사람들에게 고약한 종기가 생겼다고 전한다. 탈출기의 재앙과 닮아있는 서술이다.(탈출 9,8 이하 참조) 탈출기의 재앙은 재앙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알림에 가까운 것이었다. 


재앙의 적확한 표적은 파라오의 완고함이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짐승의 표를 지닌 사람들과 그 상에 경배한 사람들, 그러니까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과 생명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재앙이 내린다. 그들은 하느님을 싫어하거나 거부해서 재앙의 대상이 된 게 아니다. 자신들이 바라보고 이해하고 추구하는 것에 열심한 이들이어서 그들에게 하느님은 부수적인 존재였고 좋거나 싫어할 가치 부여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라오의 완고함은 요한 묵시록의 ‘그들’에게도 어김없이 발견되는 것이었다. 완고함은 하느님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믿는 이들은 일곱 대접으로 시작되는 재앙의 서술에 대해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과 생명이 무엇이냐고, 그 구원과 생명을 거부한 탓이 재앙으로 서술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단순히 하느님께 등 돌린 이들에게 죄와 벌이 떨어져 아픔과 고통이 그들을 덮쳤다는 식의 가볍고 무지한 해석에 더 이상 붙들려 있지 말아야 한다.


사실 재앙의 서술은 묵시 문학적 장치이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도 아니다. 요한 묵시록 5장에서 봤듯이 하느님의 어좌와 어린양의 자리는 세상 모든 사람이 속량되는 자리였고, 7장의 십사만 사천은 한계가 없는 무한대의 구원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자리는 제한이나 한계, 조건이나 자질의 정도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탈출기의 재앙도, 요한 묵시록의 재앙도 잘못 살거나, 실수하거나, 부족하거나, 게으른 이들을 탓하며 징계하는 데 소용되지 않는다. 제 신념과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이 너무나 옳고 분명한 것이라 단정 지은 채, 이웃과 세상에 닫혀 있는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려 유연하게 만드는 도구가 재앙이란 것이다. 


탈출기에 자주 반복되는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파라오는 마음이 완고해져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탈출 7,13; 8,15.32; 9,7.12; 10,20.27; 11,10; 14,8 참조) 탈출기든, 요한 묵시록이든 닫힌 마음을 여는 일에 재앙의 서사는 그 수준이 원시적이고 투박한 것이나, 그럼에도 필요한 것이었다. 재앙은 그러므로 징벌이 아니라 구원에로의 호소였다.


둘째 천사와 셋째 천사의 대접도 탈출기의 재앙과 엇비슷하다.(탈출 7,17-21 참조) 바다와 강이 핏빛으로 물드는 재앙은 물을 주관하는 천사를 통해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묵시 16,5-6 참조) 주님께서는 의로우신 심판관이라는 것, 그리고 재앙이 마땅한 것은 성도들과 예언자들이 피를 쏟았기 때문이라는 것. 주석학자들은 요한 묵시록 16장 5절부터 6절까지의 이 말씀이 제단 아래 영혼들이 바랐던 ‘피의 복수’(묵시 6,10 참조)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성도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그들이 마시는 이른바 복수의 피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고통과 멸망의 길을 걷는다는 것인가. 다만 우리는 6절과 7절의 외침이 하나의 전례적 찬가에 가깝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피를 흘리는 현실은 피를 통한 복수로 해결되지 않았다. 성도들과 예언자들은 현실 안에서 여전히 피를 흘리고 그 피에 대한 복수는 요원한 것이었다.


 


재앙, 징벌 아닌 구원의 호소


자기 신념과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과 이웃 배척하는 자세를


부드럽고 연하게 만드는 도구


다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과 예언자들은 전례적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 그것 하나만 갈망할 뿐이었다. 피 흘리는 현실 속 실체적 징벌과 심판을 기대하기보다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신앙적 결기가 전례적 찬가로 뿜어져 나온 것이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되어 마땅합니다”(묵시 16,6)라는 외침은 주님을 위해 흘린 피는 여전히 흘리고 있고 그 피에 대한 대가는 여전히 요원한 것이라는 현실을 끝내 받아들이는 외침이다. 그러므로 어떤 피 흘림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신앙의 마땅함은 늘 그렇게 현실을 이겨내고야 만다.


사실 세상은 꿈쩍하지 않는다. 8절에 이르러 네 번째 대접은 해의 뜨거운 열기로 사람들이 타 버렸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세상은 불에 타도 회개하지 않는다. 징벌이 내려져도 회개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옛날 파라오가 그랬고,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이 그랬고, 오늘날 우리마저 그럴 것이다. 제 지식과 신념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만큼, 우리는 얼마간 완고하고 완고한 만큼, 세상과 이웃에 배타적일 것이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구원은 세상 모든 이에게 향해 있을진대, 우리는 가끔 어설픈 정의감과 설익은 도덕 윤리로 세상을 가르치려 하면서도 정작 세상의 거친 삶에 대해선 거리낌을 가지고 세상에 비켜서서 무릉도원 같은 신앙생활에 익숙할 때가 많다. 잘못 사는 것이 독한 게 아니라 잘 산다고 여기는 그 완고함이 참으로 독한 것이다. 재앙의 서사는 그래서 더 독해지고 더 참혹해야 한다. 아직 세 개의 대접이 남아 있다. 우린 아직 회개해야 할 이유가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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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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