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매서운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던 조선교회 선교사들의 발걸음을 지탱해 준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복자 폴린 마리 자리코(Pauline Jaricot, 1799~1862)가 프랑스 리옹에서 시작한 평신도 단체 ‘전교회(Pontificium Opus Missionale a Propagatione Fidei)’, 바로 오늘날 교황청 전교기구의 전신이다.
전교회 회원들은 선교를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후원금을 모아 파리외방전교회로 전달했다. 조선대목구 초기부터 박해를 겪던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까지, 조선교회의 재정과 활동은 전교회의 지원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웠다. 교구 설정은 물론이고 선교사 파견에 따르는 모든 비용, 김대건·최양업 신부에 이르는 방인 사제 양성, 선교사들의 생활용품에서 커피와 같은 기호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원이 전교회 후원으로 이뤄졌다.
초대 조선대목구장인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전교회 연보 편집장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전교회 이사회가 내게 5600프랑을 기부했다”면서 “이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걸작이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파견된) 선교지들의 성공을 열렬히 바라는 강력한 동기”라고 전했다.
전교회는 비단 후원금만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전교회 연보를 통해 조선교회의 선교 상황을 전해 듣고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도 연대했다. 특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소식은 전교회 회원들의 큰 관심사였다. 전교회는 연보를 통해 1839년 김대건을 비롯한 3명의 신학생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김대건 신부의 사제품이나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한 과정,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소식을 페레올 주교의 편지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받고 있었다.
조선교회의 신자들도 전교회 회원으로 함께했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서한을 통해 “1년 동안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에 가입시켰다”고 보고한 바 있고,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도 전교회 입회를 희망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선교를 위해 프랑스와 조선의 평신도가 전교회라는 하나의 단체에서 한마음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이후 전교회는 교황청 직속 기구로 발전해 1922년에는 교황청 전교기구로 승격됐고, 전 세계 교회의 선교 지원을 총괄하는 중심 기구가 됐다. 1926년 전교기구의 요청을 바탕으로 세계 모든 교구와 신자들이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도록 비오 11세 교황이 선포한 날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지내는 전교 주일이다. 해마다 전교 주일 헌금은 교황청 전교기구로 보내진다.
전교회의 도움 속에서 ‘받는 교회’로 시작한 한국교회는 1965년 교황청 전교기구 한국지부를 발족하고, 보편교회와 한마음으로 활동하며 ‘주는 교회’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지부는 지난해 국내 1789개 본당에서 모금한 전교 주일 헌금 25억9414만여 원을 교황청 전교기구 로마본부에 전달했고, 한국지부 자체적으로도 28개 해외 선교 사업을 운영, 4억6915만여 원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