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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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조르조 바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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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에 성당 한 채도 짓지 않았으나, 조토부터 미켈란젤로까지 르네상스 성당 이야기 안에 그 어떤 건축가보다도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시대의 진정한 만능인이라고 평가되는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이자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근대 최초이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술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특히 그의 역서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Le Vite de pi?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은 13세기에 활동한 조토의 스승 치마부에(Giovanni Cimabue, 1240~1302)에서 시작하여 16세기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에 이르기까지 거의 3세기 동안 활동했던 예술가 200여 명의 생애와 작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의 초판은 1550년에 작고한 예술가들을 14세기, 15세기, 16세기(미켈란젤로 포함)로 나누어 3부로 출간되었고, 1568년에는 16세기의 생존 예술가들까지 포함된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바사리는 역사를 생성과 발전과 소멸의 과정으로 이해했고, 그러한 역사관에 의해서 미술도 태어나서 성장하고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미술은 고대에 생겨나서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중세에 쇠퇴하였고, 이제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태어나서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시기에 최고의 절정기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사리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미술의 ‘리나시타(Rinascita, 르네상스)’ 시기, 곧 재생(부활)의 시기라고 말한 첫 번째 사람입니다.


바사리는 1511년 아레초에서 출생하여 고향의 공방에서 미술에 관한 기초 교육을 받았습니다. 십 대 중반에 그는 피렌체로 이주하여 실비오 파세리니의 도움으로 메디치 가문에서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미술 아카데미와 공방에서 회화와 조각의 기법을 체계적으로 배웠습니다. 이후 1531년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이폴리토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로마에 가서 고대 로마의 유적들과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접했습니다.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바사리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작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메디치 가문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바사리는 1535년 이후 이폴리토와 알레산드로의 죽음과 함께 메디치 가문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이런 상황은 20년 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가 그를 피렌체로 다시 부를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541년 바사리는 피렌체 ‘사도들의 성당(Chiesa dei Santi Apostoli)’의 알토비티(Altoviti) 경당에 <무염시태의 우화(Allegoria della Concezione)>의 제작을 의뢰받았습니다. 이 그림은 바사리가 피렌체의 성당에서 완성한 최초의 제단화로, 그가 피렌체의 화단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고 처음으로 명성을 얻게 해준 작품입니다.


바사리는 자주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며 줄리오 로마노, 티치아노, 파르미자니노 등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작품을 보고 배우며 그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실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았지만, 그의 이상과는 달랐기에 베네치아를 떠나 로마로 향하였습니다.


1546년 로마에 도착한 바사리는 알렉산드로 파르네세로부터 교황청의 ‘팔라초 델라 칸첼레리아’(사무국)에 있는 ‘교황 바오로 3세 방’의 프레스코화 의뢰를 받고, 교황의 가문을 과거 역사에 비유한 방대한 작품을 조수들과 함께 100일 만에 완성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런 방식의 작품 의뢰를 많이 받았는데, 이것을 두고 후대의 비평가들은 바사리가 세속적이고 출세 지향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후 바사리는 <피에타>와 <성가정> 등의 작품을 다수 그렸고, 이 작품들 역시 화가로서의 독창성과 생동감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사리는 1550년 드디어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의 초판을 출간하고, 대성공을 거둡니다. 이에 문인들은 물론이고 다양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특히 코시모 1세의 지원으로 다시 메디치 가문과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후 바사리는 피렌체에 머물면서,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의 재건축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코시모(국부), 로렌초(위대한 자), 레오 10세 교황, 클레멘스 7세 교황 그리고 코시모 1세의 방에 그들을 추앙하는 내용의 프레스코화를 그렸습니다. 또한 그는 팔라초 베키오에 있는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의 서재(Studiolo)를 장식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그림들은 자연의 모방과 마니에라의 달성이라는 그의 미술적 이상을 구현하는 작품들이지만, 실제로는 마니에라가 과하게 표현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560년 그는 ‘팔라초 우피치(Palazzo Uffizi)’의 설계와 건축을 의뢰받았습니다. 현재 우피치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팔라초 우피치는 처음에는 피렌체의 행정관들을 위한 사무 공간이었습니다. 팔라초 우피치는 시뇨리아 광장에서 아르노강까지의 거리를 두 개의 직사각형 건물이 평행으로 가로지르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평면은 3베이 모듈로 반복되었고, 3베이는 두 개의 도리스식 오더와 그 양옆에 벽기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정교한 묘사보다는 대리석과 큰 조각상을 중심으로 고전주의를 부각한 작품입니다. 또한 1층과 2층 사이에 중간층을 넣어서 총 4층 높이를 가졌으며, 각 층의 수평성이 팔라초 우피치의 특징입니다.


건축가로서의 조르조 바사리는 화가나 미술사가로서의 그에 비해서 활동이 적은 편이었습니다. 사실 그의 건축 작품은 1555년 이후 피렌체에 머무는 기간에 메디치 가문의 도움으로 수주한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술에 진심이었던 그는 1563년 마니에라에 도달하기 위한 ‘디세뇨(Disegno)’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서양 역사상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인 ‘디세뇨 아카데미(Accademia delle arti del disegno)’를 설립하여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다양한 재능으로 많은 업적을 남기며 삶을 알차게 살아온 바사리는 1574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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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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