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노동 현실을 바라보면,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일터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전국 곳곳의 철탑 위에서는 “직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절규가 이어지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없애 달라는 호소가 끊이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산업재해 소식은 노동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노동은 숭고하고, 존엄하다는 교회의 가르침과는 달리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하는 것도 어려워 보이는 현실. 무엇이 이 같은 괴리를 낳았을까. 노동계의 현실을 살펴보고, 그 원인을 짚어본다.
팬데믹 이후 비정규직 증가…올 상반기 산업재해 사망자 287명
노동시장 이중구조 고착화 탈피 위한 제도 절실
9월 12일 서울 장교동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세종호텔 투쟁 승리 결의대회’ 현장. “고진수는 땅으로, 해고 노동자들은 일터로!”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세종호텔 해고자 복직 논의를 위한 첫 노사 교섭을 앞두고 열린 이날 집회에는 이랜드, 한화오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등 여러 기업의 노동자들도 함께했다.
이어 9월 25일 서울 명동 세종호텔 앞에서는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한 추계 사생대회 ‘동계는 없다’가 개최됐다. 화가들은 고공농성 중인 고진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며 응원의 뜻을 전했다. 별칭이 ‘유자’인 참가자가 “고진수 동지가 소나무의 기운을 받아 복직까지 힘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소나무를 그렸다”고 말했듯,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노동자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왜 이렇게 많은 노동자와 시민이 일터가 아닌 거리에 나섰을까.
고공에서 이어지는 싸움들
“코로나19라는 재난을 이용해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해고했습니다. 기업들은 팬데믹이 끝나고 이전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지만 해고 노동자들을 복직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해고된 자리를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채우며 배만 불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당함을 알리고자 투쟁하고 있습니다.”
8월 22일 서울 용산동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박정혜, 고진수 고공농성 문제 해결을 위한 3대 종교 긴급기도회’에서 고진수 씨는 화상 통화로 이렇게 호소했다.
세종호텔은 2021년 12월 코로나19로 인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고진수 씨를 포함한 조합원 12명을 해고했다. 이후 호텔은 2023년 흑자로 전환했지만, 해고자 복직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고 씨는 올해 2월 호텔 앞 철탑에 올랐고, 농성은 어느덧 2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고공농성은 고 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원청 기업인 일본 니토덴코 그룹에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경상북도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서 600일 동안 농성했던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박정혜 수석부지회장, 6월 19일 하청 노사 합의로 농성을 마무리 지은 한화오션 노동자 등 수많은 이가 철탑 위에서 싸움을 이어왔다. 이러한 투쟁을 기록한 자료도 있다. 예술 단체 ‘리슨투더시티(listen to the city)’의 디렉터 박은선 씨가 제작한 <고공여지도>는 1990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고공농성 126건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일터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올해 2분기 산업재해 현황 통계에 따르면 1월부터 6월까지 사고 사망자 수는 287명에 달했다. 이재명 정부가 올해를 ‘산재 사망사고 근절 원년’으로 공언했지만, 산업재해는 여전히 매일의 뉴스가 되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도, 생명도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들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벽
전문가들은 1990년 이후 고착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각종 노동 문제의 구조적 원인으로 지목한다. 노동시장이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1차 노동시장과 중소기업·비정규직 중심의 2차 노동시장으로 나뉘고, 이 두 노동시장 간의 격차가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박종식 연구위원은 “원청-하청 관계에서 원청이 계약상 우위를 바탕으로 열악한 근무 환경을 전가하고 있다”며 “이 구조가 다단계 하청으로 이어지며 실제 노동력 사용자를 불분명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기업들이 업무를 외주화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어, 노동력 사용자의 책임을 강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또 “임금과 근무 환경의 격차가 노조 조직률로 이어지고, 기업이 이를 견제하며 격차가 심화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제도화하고, 직무 중심 임금체계를 통해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가 비슷한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기업의 경영 문화 역시 문제라고 지적한다. “단기 성과에 집착해 인건비 절감을 노동자 처우 개선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산재와 차별을 악화시키고 있다”며, “원청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다하고 하청업체와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본보다 인간을, 이윤보다 존엄을
교회 역시 오늘날 노동이 인간이 아닌 자본을 위해 존재하는 구조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지금의 시장 구조는 인간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버리는’ 문화를 확산시키고, 시장 절대주의가 노동하는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고 규탄했다.(53~59항)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하느님을 향한 열린 마음이 불러오는 새로운 경제적 사고방식 안에서 모든 경제 정책에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반영할 것을 강조했다.(203~205항)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위원장 김시몬 시몬 신부) 부위원장 김비오(비오) 신부도 소비주의가 불러온 문제를 언급한다. 김 신부는 “지금의 사회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지적처럼 과도한 소비주의로 인해 물질을 넘어 이제는 사람까지 소비하고 있다”며 “우리는 노동을 ‘경제적 이익’이 아닌 ‘인간 존엄’의 문제로 바라보며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람을 우선순위에 두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의 가르침처럼, 이제는 노동과 노동자를 존엄한 존재로 바라보는 구체적 제도와 문화적 전환이 절실하다. 우리 사회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정의로운 노동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