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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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과녁을 겨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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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을 놓치지 말고, 제대로 겨냥하라’는 말이 있다. 과녁을 놓치면, 늘 엉뚱한 곳을 겨냥하게 된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 종종 삶의 목표, 즉 과녁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번 엉뚱한 곳을 겨냥한다. 그리고 거기에 불필요한 시간과 힘을 쏟게 된다. 


사막 교부들은 과녁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교부들의 금언집을 보면,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보이는 그들의 엄격한 금욕 수행에 지레 기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과녁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하느님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길은 사랑이었다. 


사막의 관대한 사랑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자 그들의 생활 방식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금욕 수행은 단지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결국 사막 수도승의 과녁은 하느님과 사랑이었다. 교부들의 금언집에는 이를 보여주는 흥미롭고 교훈적인 일화가 많이 있다.



과녁을 겨냥한 예들


다음 일화들은 인간이 정한 규정보다 하느님의 계명인 애덕이 우선임을 잘 보여준다. 압바 모세는 주간 단식 주간에 방문한 형제들을 환대하기 위해 요리를 조금 만들었다. 그러자 이웃 수도승들은 이에 대해 성직자들에게 고발했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압바 모세의 놀라운 처신을 알았기에 모두 앞에서 말했다. “오, 압바 모세, 당신은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모세 5)


또 카시아누스와 게르마누스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수도승들이 단식 규정을 깨고 열렬히 환대해 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그들이 한 원로에게 그렇듯 쉽게 단식을 깨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단식은 늘 할 수 있지만, 내가 여러분을 항상 대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식은 확실히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 선택에 달려 있는 반면, 하느님의 법은 우리에게 절대적 의무인 애덕을 행하도록 요구합니다. 따라서 내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이니, 나는 온갖 열성을 다해 여러분을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떠나면 나는 다시 단식 규정을 지킬 수 있습니다.”(카시아누스 1)


압바 포이멘은 사순절이라 주저하며 자신을 방문했던 한 형제를 환대한 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나무문을 닫으라고 배우지 않고 혀의 문을 닫으라고 배웠습니다.”(포이멘 58)


이 애덕의 특징 중 하나는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었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형제들을 보호했고, 누군가 죄를 지으면 그것을 듣거나 보지 않았다. 어느 날 한 형제가 죄를 지어 집회가 소집되었고 압바 모세도 초대되었다. 가기 싫었던 그는 마지못해 구멍 난 바구니에 모래를 가득 채워 가져갔다. 마중 나온 형제들이 의아해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 죄가 뒤로 줄줄 새 나오는데,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다른 형제의 잘못을 심판하러 가고 있습니다.”(모세 2)


포이멘의 다음 일화도 우리 가슴을 활짝 열어준다. “몇몇 원로가 압바 포이멘에게 와서 물었다. ‘공동기도 중에 조는 형제를 보면 우리가 그를 흔들어 기도 중에 깨어 있게 해야 합니까?’ 압바 포이멘이 대답했다. ‘나는 자고 있는 어떤 형제를 보면 그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누이고 그를 쉬게 할 것입니다.’”(포이멘 92) 


압바 디오스코루스는 거지를 만나자 좋은 투니카를 내주었다. ‘어째서 헌 투니카가 아니라 집회에 갈 때 입는 좋은 투니카를 주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같으면 예수님께 헌 투니카를 드리겠소?” 이 일화는 애덕이 전례의 성대함에 우선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사막 교부들은 늘 본질과 핵심을 놓치지 않고 과녁을 겨냥했다.


오직 하느님 향한 마음으로 관대한 애덕 보여준 교부들
수단과 목적 혼동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하느님 뜻 실천


주객전도


주객전도는 수행의 길에서, 우리 일상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예컨대, 어떤 외적이고 부수적인 것에 대한 의존 혹은 집착이라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되 그 겉모습을 보고 거기에 천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바라봐야 할 본모습,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된다. 신앙생활을, 영성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든 간에 직접 사물의 본질을 향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늘 피상적인 차원으로 끝나게 된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강을 건너라고 만든 뗏목에 집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본질을 향하지 못하고 수단, 방편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주객전도의 우를 범하기 때문에 성경의 문자에 집착하고 그 내면의 깊은 뜻을 놓쳐버리게 된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생각, 다른 신앙과 문화, 다른 민족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것이다.


과녁을 겨냥하라


중국에 임제 의현이라는 유명한 선사가 있었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살불 살조사(殺佛 殺祖師)’,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이다. 언뜻 들으면 섬뜩하고 살기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그 뜻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어떠한 것에 얽매여 본질(과녁)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뼈 있는 가르침이다.


임제 선사는 여기서 ‘무의도인(無依道人)’, 즉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본질을 향해서 스스로 자기 길을 가는 자유로운 주체적, 자립적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직접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통찰함으로써 온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이 세상 모든 사물 안에는 하느님 현존이 깃들어 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 안에도 그분을 닮은 참된 인간 본성(眞我)이 깃들어 있다. 이것을 찾고 깨달아가는 여정이 우리 영성생활이 아닐까 한다. 이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인식하지도 못하기에 우리는 쉽게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 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 없이 인간을 막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과 사람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끼고 참된 인간성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면 더는 아쉬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 깨달음 자체가 우리 삶을 인도할 것이다. 하느님 말씀인 성경은 문자로 표현된 책 자체보다도 그 안에 담긴 내용, 곧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다. 하느님 뜻의 핵심에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바로 우리가 겨냥해야 하는 과녁이다.


우리는 길을 간다. 함께 가지만 결국 혼자 가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로 본질과 핵심을 향해 소신껏 자기 길을 꿋꿋이 가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무의도인의 자유로움으로 홀로 우뚝 서서 타인의 지표,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우리 안에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있고 지금까지 배워 알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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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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