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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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고통이란 행복(묵시 1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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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천사가 나타나 자신의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는다. 대접은 정확히 짐승의 중심부를 향한다. 짐승의 권세와 통치를 가리키는 ‘왕좌’를 향하고 있어서 짐승의 영향력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는 게 다섯 번째 대접이다. 그 결과 짐승의 나라는 어두워졌다. 


탈출기 10장 22절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하느님은 이집트 파라오의 완고함에 어둠이라는 재앙을 내리셨다. 이집트는 태앙신 ‘라(Ra)’를 섬기고 있었으므로 어둠이 내린 이집트는 하느님의 재앙 앞에 속수무책 무너진 것이다. 지혜서는 어둠을 가리켜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리키는 은유로 소개한다.(지혜 17,2 참조) 이 단절을 요한 묵시록은 혀를 깨물 정도의 고통으로 다시 해석한다. 


하느님과의 단절이 인간에게 고통이 된다는 도식은 복음서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바깥 어둠 속에 던져져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단절의 고통을 자주 언급한다.(마태 8,12; 22,13; 25,30 참조) 베드로의 둘째 서간과 유다서에서도 ‘어둠’의 자리는 배교자들이 심판받는 자리로 제시되기도 한다.(2베드 2,17; 유다 1,13 참조)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고통이 닥쳐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능은 불편함과 고통을 피하고 싶도록 작동할 터인데, 고통이 있어도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회개가 삶의 방향을 돌이켜 멀어진 것을 다시 가까운 것으로 만드는 전환의 행위라고 한다면, 하느님과 멀어진 것이 고통이지만 다시 하느님께 향하는 방향의 전환이 더더욱 싫은 것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일 때 회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고통이 있어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고통의 자리를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가 넘쳐나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힘들어도 그것을 놓아 버릴 때 오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상실감이 회개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혜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부드러운 질타를 받고도 훈계로 삼지 않는 자들은 그에 합당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자기들이 신으로 여겼던 바로 그것들로 징벌을 받자 그것들에게 화가 난 저들은 사실을 보고서야 자기들이 전에 알아 모시기를 거부하던 그분께서 참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가장 무거운 단죄를 받았습니다.“(지혜 12,26-27)



고통과 질타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운명이 징벌과 단죄라는 가르침은 성경 안에서 확연하다. 그럼에도 요한 묵시록의 ‘사람들’은 다만 하느님을 모독할 뿐이다. 고통은 더 이상 회개를 위한 장치로 작동하지 않는다. 회개에로의 초대는 계속되나, 그 초대에 응답하는 건, 하느님의 재앙이나 그로 인한 고통으로도 가능한 게 아니다.


고통의 재앙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여섯 번째 대접은 이제 유프라테스강으로 향한다. 유프라테스강은 말라버린다. 그 강이 마르는 것과 해 돋는 쪽 임금들의 길이 나는 것은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 제국을 제압하는 역사적 사건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대목이다. 물을 마르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심판으로 바빌론은 영원히 황폐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의 묘사다.(예레 28,3; 50,39-40 참조) 


바빌론은 하느님을 거역한 세상의 모든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세상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심판은 여지없이 실행되어 회개를 촉구한다. 고통에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의 완고함은 그 위대한 바빌론마저 무너뜨리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끝내 항복할 것인가.


13절은 더 이상 사람들의 태도를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 대신 악의 세력 그 자체가 전면에 나선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은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나타난다. 유다 사회는 개구리 형상을 기만적인 헛된 소리, 파괴와 혼란의 울음 등으로 이해해 왔다. 그렇다면, 악을 가리키는 용과 짐승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헛된 것이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은 온 세계 임금들을 모아 하느님과 전투를 벌이려 한다. 전투는 ‘저 중대한 날’에 펼쳐지는 것으로, 구약의 즈카르야가 말하는 ‘종말론적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즈카 12~14장; 스바 3장 참조) 종말론적 전투는 하느님의 승리로 끝이 나며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이 난다고 소개한다.(묵시 19,11-21 참조) 악의 세력 그것은 그리 힘센 것이 아니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다. 악의 세력에 기대어 완고해진 사람들의 회개 문제도 그 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우린 유추할 수 있다. 완고함의 끝은 사람들에게 허무하다. 끝내 버리지 못해 움켜쥔 것이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야 마는가.


 


깨어 있어 의로움 지키는 일


우리가 희망하고 촉구할 자세


신앙 안에 고통 겪는 신자에게 하느님은 ‘행복’을 선물하실 것


그러므로 우리가 희망하고 스스로 촉구해야 할 자세는 15절의 성도들을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성도들의 자세는 ‘깨어 있어 제 옷을 지키는 일’이다.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을 가리키고 벌거벗음은 우상숭배로 드러나는 수치를 말한다.(에제 16장; 나훔 3,5; 이사 20,4 참조) 이런 권고의 말은 악이나 그의 세력에 맞서는 대립적 자세를 부추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 어떻든 제 삶의 고유한 정체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라는 격려에 가깝다.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 묵시록은 더러운 영이 세상 임금들을 모은 곳이 ‘하르마게돈’이라고 한다. ‘므기또의 산’이라는 뜻을 지닌 ‘하르마게돈’은 의인들이 악한 왕국에 의해 공격받던 곳이고(판관 5,19 참조) 거짓 예언자들이 꺾인 곳이며(1열왕 18장 참조) 이스라엘의 슬픔이 가득한 곳으로(2열왕 23,29 참조) 이해되어 왔다. ‘므기또의 산’은 그러므로 또다시 한번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그분이 공격받는 곳을 상징한다. 


어떤 공격이든, 어떤 위협이든 성도들은 제 옷을 지켜야 한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재앙의 고통과 다르다. 제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면서 겪는 고통은 거룩하고 보람되며 의미가 있다. 제 완고함에서 비롯된 재앙의 고통은 스스로 옥죄는 자기 파멸의 고통이다. 그런 고통은 겪고 나면 자신이 사라진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은 겪을수록 자신이 단단해진다. 하느님은 그런 성도들에게 행복이란 선물을 주신다. 그 행복은 설익은 감정의 환희가 아니라 억척스럽게 달릴 길을 달리고 난 후 내쉬는 가쁘고 깊은 호흡에서 느껴지는 뿌듯함이 분명하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우린 행복하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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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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