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오랜만에 일본 도쿄에 다녀오게 되었다. 릿쿄대학교에서 오랜 기간 추진해 왔던 윤동주의 시비가, 갖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세워진다는 소식이었다.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동시통역을 위해 강연 초안을 요청받았다. 이 행사에는 연세대 총장을 비롯한 다수의 내빈이 참석했고, 서울의 정치인들도 온다고 했다. 또 그가 머물렀던 교토의 도시샤대학교 관계자들을 포함해서 그가 죽은 후쿠오카의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 사람들도 참여한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시인으로 데뷔를 한 것도 아니었다. 자비로라도 책을 출판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죽은 지 거의 100년이 다 되도록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쳐도, 일본에서는 또 ‘왜?’ 이토록 그가 걸어간 짧은 자취마다, 시비가 건립되는 사람은 한국의 유명 시인들조차도 얻지 못하는 월계관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그의 시집을 사 들고 그것을 읽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소녀가 좋아할 만한 취향의 시들이었다. 아름다웠고 부드러웠고 선했다. 그 뒤에는 그의 짧은 생애가 수록되어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데, 그가 사상 불량자로 후쿠오카 감옥에 갇히자 그를 면회 간 가족의 회상이 있었다.
그는 안경조차 빼앗겨 더듬거리며 면회실로 나와 말했다고 했다.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있어.” 그가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알고 있었다. 특히 생체 실험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미 근시여서 안경이 없을 때의 고통에 대해 알고 있었던 나는, 일기에 그렇게 썼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다 치자, 그래도 시인에게는 그래서는 안돼. 안경은 빼앗으면 안 돼. 아아 너희는 그러면 안 되었어.” 그렇게 윤동주는 죽었다.
이 두 개의 극명한 사실의 충돌. 생각해 보면 하늘과 바람을 노래한 시인은 많았다. 식민지의 한복판에서 제국에 대항하다 죽은 시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둘을 동시에 겸비한 시인은 없었다. 그의 시에서 죽는 날까지 그는 단 한마디의 증오도 내비치지 않았다. 일제의 만행과 세계적 규모의 악행에 대해 친구들과 토론했고 저항했던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만일 그의 곁에 있었다면, 나는 말했을지도 모른다. “네 시가 좋긴 한데, 속이 터져.”
그러나 그는 그 속 터지는 짓을 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되자,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밑에 / 조용히’ 흘리며 죽었다.
그리하여 모든 열혈한 저항 시인과 모든 서정 시인이 다 잊혀 가는 중에, 홀로 조용히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대못을 박았다. 그의 생애와 글이 한데 모여 시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진정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리하여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 드디어 적지의 한복판, 아직도 극우 인사가 국회에 당선되는 이케부쿠로역 근처에 아름다운 시의 대못을 박아 넣었다.
나는 다음 말로 강연을 마쳤다. “그렇습니다. 왜 윤동주인가?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메시지는 예수가 남긴 마지막 말과 같아요. 그것은 ‘평화!’입니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