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공화국의 베로나 출신인 미켈레 산미켈리(Michele Sanmicheli, 1484~1559)는 석공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가족 작업장에서 돌을 다루는 법을 자연스레 체득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또한 산미켈리는 베로나의 로마 유적들로부터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 건축물을 자주 접하였는데, 그 영향인지 10대 중반에 로마의 브라만테 건축 공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비슷한 또래의 발다사레 페루치와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는 건축의 선배이자 인생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산미켈리가 건축가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곳은 오르비에토입니다. 그는 1509년부터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로 있으면서 성당의 파사드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처음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파사드는 네 개의 수직 버트레스 다발로 세 부분으로 구획되어 있고, 버트레스 위에는 첨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부의 페디먼트 삼각형은 상부의 페디먼트로 반복이 되고 여섯 개의 삼각형이 중앙의 원형창과 이중 사각형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산미켈리는 중앙 원형창 상부의 페디먼트 양쪽에 첨탑을 세우는 등 르네상스 양식으로 공사를 진행하였지만, 그도 대성당을 완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대성당은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와 이폴리토 스칼차에 의해서 매너리즘 양식이 추가되면서 16세기 말에 완공되었습니다.
산미켈리가 오르비에토 대성당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활동한 시기는 1527년 로마 대약탈이 발생했을 때부터입니다. 이탈리아 전쟁이 가열되자 바오로 3세 교황은 교황령을 지킬 수 있는 튼튼한 요새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도시들은 모두 성채 공사에 뛰어들었습니다.
산미켈리도 그때 고향 베로나와 베네치아에서 성채 설계와 공사 감독을 수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성채의 새로운 형태와 공법을 개발하여 성채 공사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베네치아령의 크레타, 달마티아, 코르푸에서도 그에게 성채 공사를 요청할 정도였으며, 이후로 그는 평생을 ‘군사 건축’ 분야에 헌신하였습니다.
산미켈리는 성채와 같은 대형 토목공사만이 아니라 팔라초와 성당 같은 고급 건축공사도 많이 수행하였습니다. 먼저 고향 베로나에 팔라초를 여러 채 지었는데, ‘팔라초 폼페이’, ‘팔라초 카노사’, ‘팔라초 베빌라쿠아’가 대표적입니다. ‘팔라초 폼페이’는 브라만테의 팔라초 카프리니(라파엘로의 집)를 베로나식으로 해석해서 지은 것입니다.
‘팔라초 카노사’는 역시 로마의 팔라초 양식에서 가져왔는데 발다사레 페루치의 빌라 파르네시나 혹은 줄리오 로마노의 팔라초 테를 연상하게 됩니다. 이 두 팔라초는 결국 ‘팔라초 베빌라쿠아’에서 종합되었는데, 줄리오 로마노와 매너리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산미켈리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성당으로는 ‘펠레그리니 경당’(Cappella Pellegrini)과 ‘마돈나 디 캄파냐 성당’(Chiesa della Madonna di Campagna)을 들 수 있습니다. 베로나의 산 베르나르디노 성당 안에 있는 ‘펠레그리니 경당’은 펠레그리니 가문의 묘지로 마르게리타 펠레그리니 백작 부인이 산미켈리에게 의뢰하여 1528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산미켈리는 로마에서 고향 베로나로 돌아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성채 공사를 시작하기 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묘지로 계획하였으나 경당을 짓는 것이 가문과 후손들에게 더 뜻깊을 것이라는 생각에 설계 방향을 경당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산미켈리는 경당의 설계 모티브를 로마의 ‘판테온’과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키지 경당’에서 얻었습니다. 우피치 미술관에 산미켈리의 도면이 남아 있는데, 그는 실제로 지어진 성당보다 규모가 큰 그릭 크로스 평면으로 설계하였습니다. 외부에서 볼 때 높은 기둥과 받침대가 있는 코린트식 오더, 그리고 높은 돔으로 구성하여 입체적이고 장식적인 형태로 표현하였습니다. 평면은 지름이 12미터인 원형으로 높이는 20.5미터에 이릅니다. 난간이 있는 발코니로 두 개 층으로 나뉘고, 격자 돔 상부에 랜턴이 있습니다.
1층은 코린트식 오더가 받치는 에디큘라(기둥이나 벽감 안의 작은 신전)가 네 개 있는데, 세 개는 제단으로 쓰이고 한 개는 출입구로 쓰입니다. 1층 위에는 난간이 있는 발코니가 있고 그곳에서 원의 지름이 더 큰 2층이 시작됩니다. 2층 역시 코린트식 오더로 드럼이 구성되어 있고 그 상부에 돔이 있습니다. 2층에도 네 개의 에디큘라와 네 개의 대형 창문이 있고 창문은 두 개의 기둥에 의해서 세 부분으로 구획됩니다. 2층의 창문은 1층의 제단 부분과 일치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마돈나 디 캄파냐 성당’은 산미켈리의 마지막 작품으로, 공사는 산미켈리가 사망한 해에 시작되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베로나 성벽을 철거하면서 그곳에 있는 성모자 프레스코화를 보존하기 위한 성당을 짓기로 하고 산미켈리에게 의뢰하였습니다. 그의 설계는 브라만테가 템피에토를 설계할 때처럼 티볼리의 시빌 신전과 로마의 헤라클레스 빅터 신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외부는 페리스타일에 해당하는 원형의 콜로네이드가 있고, 셀라 부분은 브라만테의 템피에토에 비해서 상당히 높이 설계되었습니다.
이렇게 외관은 원형이지만 내부는 팔각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펠레그리니 경당이 외부에 콜로네이드가 없고 외부와 내부가 모두 원형 평면인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평면은 성당의 동쪽에 제단이 있는 그릭 크로스의 중앙집중형 평면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단에 성모자 프레스코화가 설치되어 있고, 제단 주변으로 성구실과 나선형 계단이 있는 탑이 있습니다. 1층 상부에는 돔을 받치는 팔각형 드럼이 놓여 있고 그 위에 돔이 얹혀 있습니다.
미켈레 산미켈리는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베네치아의 장식 지역주의의 조화를 이루어낸 건축가로 평가받습니다. 베네치아의 지역 전통은 장식적 기교로 인해 매너리즘과 유사하게 보이지만, 매너리즘 건축가들이 보인 고전에 대한 일탈보다는 고전의 전통을 이어받는 경향을 띠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산미켈리는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의 사이에서 고전과 일탈을 모두 포용하는 방향으로 16세기 베네치아의 건축 경향을 이끌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