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여학생들’, 유리건판,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하느님 모상인 모든 인간은 존엄한 인격체
얼굴은 그 사람의 자아를 반영한다. 기쁨과 환희, 자비와 관용, 고달픔과 슬픔, 분노와 인색이 모두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의 첫 인상을 통해 됨됨이를 판단하기도 하고, 기분을 헤아리기도 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선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일 뿐 아니라 주님을 통해 사랑이 가득하고 자비가 풍성한 거룩하신 하느님을 뵈었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얼굴은 아름답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늘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우신 하느님의 얼굴을 뵈려 한다. 신앙은 온 인격으로 하느님께 귀의함을 뜻하기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자기 인생의 첫 자리에 모신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세 1,26 참조) 그래서 교회는 보이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며,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개개인이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기에 모든 인간은 존엄한 인격체다.
하느님 모습으로 지어진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따라서 인간은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이다.
성경은 영혼을 ‘인간 생명’과 ‘인격’ 전체로 표현한다.(마태 16,25-26; 요한 15,13) 그러면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마태 26,38), 가장 가치 있는 것(마태 10,28)으로 영혼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인간 개개인의 영혼은 부모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고, 불멸한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인간의 육체 또한 존엄하다. 인간의 육체는 영혼을 통해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는 인간은 그 육체적 조건을 통하여 물질 세계의 요소들을 자기 자신 안에 모으고 있다. 이렇게 물질 세계는 인간을 통하여 그 정점에 이르며, 창조주께 소리 높여 자유로운 찬미를 드린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적 생활을 천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인간은 하느님께 창조되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자기 육체를 좋게 여기고 존중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사목 헌장」 14)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게 존엄하다. “영혼과 지성과 의지를 지닌 인간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이미 하느님을 향하고, 영원한 행복을 향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진리와 선을 탐구하며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완성을 추구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711) 따라서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의 영원한 생명을 향한 행복 추구권을 침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낙태와 사형 등 인간 생명을 앗아가는 어떤 행위도 정당화될 수 없다.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풀숲에 앉은 여학생’, 유리건판,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뜨거운 믿음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눈동자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많은 한국인의 얼굴을 사진에 담았다. 그는 수줍게 웃는 얼굴, 차분한 표정, 앳된 얼굴, 담담한 얼굴 등을 통해 각자의 삶을 지탱해온 인간 본성을 살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우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얼굴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삶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웅변했다.
“풋풋한 젊은이들의 두 눈은 행복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삶에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무엇이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를 이 황량한 산중 고독 속으로 내몰았는지도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 자랐고, 그런 환경에 만족한다.…뜨거운 믿음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저 눈동자들! 이 산골짜기에서 신앙을 구했고, 신앙은 그들의 전부였으니, 그들이 이 산골짜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91~193쪽)<사진 1>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인을 ‘생각 깊은 자연주의자들’이라고 칭송했다. 자연의 신비를 관조하고 경청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한국인들은 자연을 꿈꾸듯 응시하며 몇 시간이고 홀로 앉아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인에 반해 일본인들을 ‘물질주의자’라 했다. 일본인들은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그것을 소유하는 데에 더 큰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85쪽 참조)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듯 ‘풀숲에 앉은 한 여학생’을 촬영했다.<사진 2> 그리고 경건한 신앙심을 지니고 올바로 기도하는 신앙인을 생각 깊은 자연주의자로 인지했다. “옛 사막교부들이 그러했듯이 이들도 한데 모여 살지 않았다. 집들이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어떤 집은 반 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주민은 모두 12명도 채 되지 않았다. (?) 그들은 지독한 가난마저 사랑했다. 기도하고 일하며 늘 하느님께 의탁했다. 그들은 홀로 침묵 가운데 묵주 기도를 바치며 길을 걸었다. 매일 아침 그들은 돗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기도를 바쳤다. 밭일을 하고, 장작을 패고, 물을 길을 때도 그들은 헌신적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쳤다. 하여 그들의 얼굴에는 깊은 평화가 서려 있었다.”(「분도통사」 325~326쪽)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원피스를 입은 여아’, 유리건판,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아기를 안고 있는 소녀’, 유리건판, 192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하느님 자비의 얼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눈은 하느님을 갈망한다. 그리고 얼굴과 손에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열기를 내뿜는다. 이 갈망은 나이가 적든 많든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말 그대로 ‘본성’이다. 인간이 바로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사진 3>
“어떤 가족은 매일 꼬박꼬박 성실하고 정확하게 삼종기도와 아침·저녁 기도, 묵주 기도를 올린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고맙고 기뻤다. 그들의 기도생활은 마치 수도원 하루 일과와도 같았다. 내가 찾아가서 머물 때 교리문답을 다시 하고 질문을 하면 답을 해준다. 이 신자들의 기억력은 정말 대단하다. 몇 년 동안 교리책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물음과 대답뿐 아니라 해석까지도 다 외우고 있는 신자도 있었다.”(칼리스터 히머 신부 회령본당 1928년 연대기 중)
하느님 자비의 얼굴은 바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과 행동, 그리고 온 인격으로 하느님 자비를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 삶에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 이는 세상에 하느님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생생한 사랑과 자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삶이다. 온유한 배려와 환대, 너그러운 용서와 진심 어린 겸손으로 하느님을 향한 애끓는 사랑을 실천하자. 그 사랑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새 생명인 ‘태아’를 존중하고 그 생명을 지키는 일로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사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