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위령 성월이다. 특히 1일부터 8일까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2일)’을 포함한 기간 중, 정성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연옥 영혼에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교회가 운영하는 일반적인 봉안당이나 추모 공원을 방문할 수 있지만, 많은 성지에 성인과 복자 혹은 순교자 묘역이 조성돼 있기에 성지를 찾는 것도 좋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 복자 윤유오(야고보)의 묘역에서 시작된 어농성지(전담 윤석희 미카엘 신부)를 찾았다.
밀알 하나가 떨어지다, “다 이루었다”
성지는 경기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62번길 148에 자리하고 있다. 성지 주차장에서 포장도로 혹은 비포장 잔디밭 길 둘 중 하나를 따라 우측으로 올라가면 성당이 나온다. 나지막한 황토색 건물이 대지와 어우러져 편안한 느낌을 준다. 성당 앞에는 돌아온 탕자를 연상시키는 동상이 부친을 부둥켜안고 “아버지!”를 부르짖고 있다. 동상 이름은 ‘돌아온 탕자’가 아닌 <아버지 상>이다. 나 자신의 회개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누군가의 회심을 받아들일 줄 아는 용서와 화해의 마음 또한 중요함을 깨닫는다.
2002년 봉헌된 성당 내부는 한층 더 토속적이다. 나무와 황토, 짚으로 마감된 정답고 전통적인 분위기가 이곳이 한국 순교자를 기리는 곳임을 보여준다. 벽에는 성지에서 모시는 한국교회 순교 복자 17위 중 8위의 성화가 걸려 있다. 오동회(가타리나) 화백의 세밀한 그림에 복자들의 따뜻한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성전에 들어서자,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너머로 걸린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십자가 모양이 아닌 탓에 처음에는 무엇인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지만, 그 어떤 십자가보다 더 깊은 묵상을 이끈다. 고상 위에 “다 이루었다”(공동번역 요한 19,30)는 말씀이 새겨져 있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며 고개를 떨구시던 바로 그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구원의 은총을 빛살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유봉옥(제노베파) 작가가 하나의 소나무로 5개월간 조각해 완성했다.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어야만 비로소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성지 성당에서 봉헌되는 오전 11시 미사에 참례한다. 순례 날은 마침 성지의 추수 일이다. 어농(於農)성지는 이름 그대로 농사와 관련이 깊다. 때문에 성지는 자체적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시는 하늘과 땅, 바람과 햇살, 눈과 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기도드리는 선조들의 정신을 받들고 살린다.
자연의 순리에 맞춰 피와 가라지도 뽑지 않고 약도 치지 않아, 이상기후가 더해진 올해는 아쉽게도 풍년은 아니다. 그래도 미사 중에 요즘 도시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잘 익은 벼 이삭을 받으니, 마음은 만석 부자 못지않게 풍성해진다. 오늘 미사의 영성체송 “나는 그리스도의 밀알이다”를 묵상해 본다.
주님 닮은 ‘좋은 땅’ 17위
어농성지는 을묘박해(1795) 순교 복자 윤유일(바오로), 신유박해(1801) 순교 복자 주문모 신부 등 17위의 순교자를 모시고 있다. 이 가운데 윤유오 복자의 묘에는 유해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나머지 묘역은 의묘다. 성지는 원래 파평윤씨의 선산이었고, 유해가 이곳에 모셔진 뒤 집안이 토지를 교회에 봉헌해 성지가 조성됐다. 1987년 성모상과 묘역 축복 미사가 봉헌되며 본격적으로 순례지로 자리 잡았다.
윤유오·윤유일 형제, 윤운혜(루치아), 윤점혜(아가타)는 모두 파평윤씨로, 여주 출신이다. 이중 윤유일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도운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동생 윤유오는 형의 뒤를 이어 교리를 연구하고 기도 모임을 갖다가 이어진 박해로 순교했다. 같은 여주 출신으로 부부인 복자 정광수(바르나바)와 윤운혜는 특히 묵주를 많이 만들어 전교하는 데 열심이었다고 알려진다. 또한 복자 이중배(마르티노), 정순매(바르바라), 조용삼(베드로), 최창주(마르첼리노), 원경도(요한), 심아기(바르바라), 윤점혜(아가타) 등도 모두 경기 출신이다.
성지는 형구전시관에 순교자들의 고문이나 이동에 썼던 의자 형틀과 수레 등을 실물 크기로 전시해 놨다. 또 농사짓는 성지답게 생태 농원이 넓게 자리한다. 십자가 동산에는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묵상의 터를 이룬다. 이 외에도 성지에는 피정의 집인 ‘야고보의 별’, 십자가의 길, 야외 제대 등이 마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