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아일랜드 의사당 앞에서 열린 낙태 반대 시위에서 십자가와 묵주가 달린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OSV
2024년 5월 6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생명을 위한 행진(March for Life)’ 집회에 참여한 일부 참가자들과 함께 아일랜드 주교회의 생명위원회 위원장 케빈 도란 주교(왼쪽)와 아일랜드 주교회의 의장 에몬 마틴 대주교가 낙태 합법화 반대 시위를 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OSV
아일랜드 보건부가 발표한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1만 852건의 낙태 시술이 시행됐다. 아일랜드에서 집계된 낙태 건수 중 역대 최고치다. 이는 낙태가 합법화된 2019년(6666건)에 비해 무려 62.8가 증가한 수치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아일랜드에서 시행된 낙태는 총 4만 8984건으로, 2020년 이후 해마다 1만 명이 넘었다.
아일랜드는 2018년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제8조를 폐지, 낙태 합법화의 길을 열었다. 1983년 제정된 제8조는 태아에게 어머니와 동등한 생명권을 부여하며 사실상 낙태를 전면 금지한 조항이었다. 아일랜드 정부는 수십 년간 낙태를 금지해 오다가 2019년 1월 ‘임신중절 규제법(Health Regulation of Termination of Pregnancy Act)’ 시행으로 본격적으로 낙태 시술을 허용했다. 2024년 보고된 낙태 1만 852건 중 98.7는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에 직접적인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아일랜드 주교단이 2022년 아일랜드 보건부에 제출한 ‘2018년 임신중절법 운영 검토에 관한 의견서’.
아일랜드 주교단이 보건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지적한 잘못된 점들
위기 임신부에 대한 이해·노력 전혀 없어
낙태 이외의 해결책 제시하지 않아
무고한 생명 빼앗는 행위를 합법화
양심적 낙태 거부권도 인정되지 않아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아일랜드 주교단은 2022년 보건부에 ‘2018년 임신중절법 운영 검토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낙태 합법화 3년을 평가하는 내용으로, 질문·답 형식으로 구성됐다.
아일랜드 주교회의 생명위원회 위원장 케빈 도란(Kevin Doran) 주교는 본지에 서면 인터뷰 답변과 함께 아일랜드 보건부에 제출한 ‘법을 폐지하라’는 제목의 ‘2018년 임신중절법 운영 검토에 관한 의견서’를 함께 보내왔다. 아일랜드 주교단은 2022년 낙태 합법화 3년을 평가하는 의견서를 아일랜드 보건부에 제출한 바 있다.
주교단은 의견서에서 ‘이 법이 본래 의도한 목표를 달성했다고 보는가?’란 질문에 “낙태를 허용한 이 법은 위기 임신 상황에 처한 여성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며 “임신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여성들의 고통의 원인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고, 그 원인을 해소하려는 노력도 없다”고 답변했다.
이어 “법은 3일의 숙려기간을 규정하고 있으나 그 시간을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데 사용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낙태 이외의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이 법은 무고한 인간 생명을 직접적이고 의도적으로 빼앗는 행위를 합법화함으로써 국가의 도덕적 권위를 심하게 훼손한다”고 강조했다.
주교단은 의견서에 낙태 결정과 관련해 임신부의 신체·정신적 건강 및 사회적 지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수집되지 않는 점, 병원이나 사회복지기관에서 양심적 낙태 거부권이 인정되지 않는 점 등도 지적했다.
주교단은 ‘법의 어떤 부분이 잘 운영되고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 이 법은 그 의도와 결과 모두 공익(Common Good)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못 박았다. 의견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됐다.
“생명권은 침해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다. 낙태법은 이 불가침의 생명권을 입법자의 판단 아래 두어, 결국 모든 인간의 생명권을 약화시킨다. 국가가 특정 생명을 처벌할 수 있다면, 어떤 인간의 생명도 안전하지 않다. 국가는 모든 사람, 특히 스스로 권리를 지킬 수 없는 가장 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중략) 현대의 부유한 사회가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낙태 외의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정부는 낙태 이외의 선택지를 제공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 이는 중대한 실패이며, 즉시 시정되어야 한다. 임신으로 고통받는 모든 여성이 자신의 아이를 직접 돌보거나 아이를 원하고 사랑으로 돌볼 준비가 된 다른 부부에게 맡길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 법은 아이의 아버지를 임신과 출산의 공동 책임자로 참여시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모든 선의의 시민들은 이 법의 폐지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임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진정한 지원과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아일랜드 주교회의 생명위원회 위원장 케빈 도란(Kevin Doran) 주교
아일랜드 주교회의 생명위원회 위원장 케빈 도란 주교는 아일랜드의 여성 낙태 건수는 훨씬 많이 증가했지만 국가는 이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낙태가 여성·태아 위한 ‘연민’이라는 건 착각
“낙태가 합법화되기 전에는 낙태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여성 수가 줄어드는 추세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일랜드 내에서만 연간 낙태 건수가 과거 영국에서 원정 낙태를 하던 아일랜드 여성 수의 4배에 달합니다.”
아일랜드 주교회의 생명위원회 위원장 케빈 도란(아일랜드 아콘리·엘핀 교구장) 주교는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문제는 국가가 ‘왜 여성들이 낙태를 선택하는가’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 이유에 대한 통계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라고 비판했다.
도란 주교는 “아일랜드는 명목상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나라지만 낙태를 찬성한 유권자 대부분도 가톨릭 신자였고, 실제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들 역시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일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현행 아일랜드 법에 따르면 여성은 임신 12주 이내에는 아무 이유 없이 낙태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많은 여성은 역사상 가장 교육받은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낙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면서 ‘임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이는 출산이라는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을 가로막는 심리적·사회적 장벽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아일랜드 교회는 낙태가 합법화된 후 다양한 방식으로 생명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며, 해마다 ‘생명을 위한 9일 기도’를 통해 생명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또 영국·웨일스·스코틀랜드 교회와 협력해 매년 ‘생명을 위한 날(Day for Life)’ 공동 메시지를 발표하고, 전국 규모 생명 순례를 개최하고 있다.
“낙태를 지지하는 이들은 ‘연민(compassion)’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교회 역시 오랫동안 ‘연민’이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덕목임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이가 낙태가 아기나 어머니 모두에게 진정한 연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진정한 연민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주는 데에 있습니다.”
도란 주교는 “낙태 논의에서 문제 되는 것 중 하나는 많은 사람이 ‘연민’이라는 이름으로 진실을 외면한다는 점”이라며 “반대로 연민 없이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출산을 가로막는 그 장벽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육받은 가톨릭 신자들이 도덕적 문제에 대해 감정이 아닌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란 주교는 “아일랜드의 생명운동은 평신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며 “특히 똑똑하고 헌신적인 젊은 여성 리더들이 많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너무 강하게 나설 경우 교회가 사회를 통제하려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아일랜드에서는 평신도들이 주교나 사제가 대신 말해주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며 “평신도들은 이웃이나 직장 동료에게 낙태가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정부의 낙태 전면 합법화 시도라는 도전에 직면한 한국 가톨릭교회와 신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여러분은 태아를 ‘한 인간’으로 말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유전학적 과학은 수정된 배아가 고유한 개체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울러 “나이를 출생이 아닌 수태 시점부터 헤아리는 동양 문화권에서의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큰 강점이 될 수 있다”며 “낙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