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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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의 말발굽에 짓밟힌 폐허에서 탄생한 성모 순례지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48. 오스트리아 프라우엔키르헨 성모 탄생 순례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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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슈타트교구의 프라우엔키르헨 성모 탄생 순례 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14세기부터 순례지로 알려졌으며, 매년 10만 명의 순례자가 찾는 부르겐란트의 대표 순례지다. 제2차 빈 공방전이 끝난 뒤인 1695~1702년 파울 에스테르하지 제후의 후원으로 프란체스코 마르티넬리가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했다. 1990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준 대성전으로 지정됐다.

오늘의 유럽에서 ‘이슬람’이라는 단어는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가깝게는 난민·이주 문제·히잡 논쟁에서, 멀게는 중동의 테러 기억이 뒤섞여 있지요. 그런데 기억 저편에는 아주 오래된 역사적 사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세 십자군 전쟁은 그저 예루살렘 성지 탈환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하나였던 세계를 그리스도교인 ‘우리’와 이슬람인 ‘남’을 가르는 계기였습니다. 그 감정의 골은 16·17세기 오스만 제국군의 두 차례 유럽 공격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1529년 쉴레이만 대제는 1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도나우강을 따라 진격해 브라티슬라바를 거쳐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산인 빈을 포위합니다. 비어있던 헝가리 왕좌를 두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한판이 벌어진 건데요. 헝가리에 자기 봉신을 왕으로 세우고, 서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차지해 중세 교역의 대동맥인 도나우강 일대를 장악하려 한 것이죠.

이때 유럽인의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다들 두려워했죠. 지금 유럽이 느끼는 막연한 거리감은 그때 느꼈던 공포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그 무서운 기억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소개할 오스트리아 동부 평원의 프라우엔키르헨 순례 성당입니다.
오스트리아 최대 호수인 노이지들러호(湖). 호수 주변이 포도 산지이다. 호수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마을이 프라우엔키르헨이고, 그 뒤로 헝가리 평원이 펼쳐져 있다.

부르겐란트의 성모님 마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발한 기차는 도나우강을 건너 슬로바키아·헝가리와 마주한 동쪽 평원으로 향합니다. 창밖으로는 언덕 위 포도밭이 펼쳐져 있고, 사이사이로 천천히 도는 풍력발전기가 보입니다. 한 시간 남짓 달리면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호수인 노이지들러호(湖)에 다다릅니다. 프라우엔키르헨은 이곳 호수 동쪽 평원에 있는 인구 3000여 명의 조그만 시골 도시입니다. 중심에 프라우엔키르헨 성모 탄생 성당과 붉은 지붕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지요.

프라우엔키르헨은 1324년 문서에 처음 등장합니다만, 로마 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습니다. 중세 초 이곳은 헝가리 왕국의 땅이었는데요. 전설에 따르면 헝가리의 안드라시 2세 통치 시절 페르퇴호, 그러니까 지금 이름으로 노이지들러호가 범람하여 여러 마을이 물에 잠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1240년 새로운 마을을 조성했는데, 그게 지금의 프라우엔키르헨입니다. 1324년에 ‘거룩한 마리아(Szent Maria)’란 마을 이름이 기록에서 보이는데, 당시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도 있었고 주변에 순례지로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훗날 오스트리아 땅이 되면서 붙은 지명인 프라우엔키르헨도 성모 성당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주 제대(1873년)와 은총의 성모자상(1240년). 성모자상을 두고 정의와 신앙의 수호자로서 가톨릭 신앙을 공고히 한 헝가리의 성왕(聖王) 이슈트반 1세와 라슬로 1세의 성상이 서 있다. 고딕 양식의 성모자상은 보리수를 조각해 만든 것으로 이후 바로크 양식의 장식이 더해졌다. 원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포르히텐슈타인성 성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두 번의 전란에도 무사했다고 한다.

오스만 튀르크의 공포를 신앙으로 승화한 프라우엔키르헨 ‘평원의 성모’

오스만 제국군은 압도적인 병력에도 가을비와 추위, 보급로 붕괴로 철수하고 맙니다. 하지만 빈 주변 평원의 마을들은 철저히 짓밟혔습니다. 폐허가 된 프라우엔키르헨은 한동안 잡초만 무성했습니다. 가까스로 다시 삶이 시작되려던 1683년에 15만의 오스만 제국군이 다시 빈을 향해 쳐들어왔죠.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진격의 통로에 있던 프라우엔키르헨이 속한 부르겐란트 지역은 다시 폐허가 되었습니다. 주민들은 흩어지고 성모 신심의 중심이던 옛 성당도 완전히 파괴되었죠.

이런 폐허가 성모 순례지로 다시 부흥할 수 있었던 건 헝가리 에스테르하지 귀족 가문 덕분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 일대를 다스리던 귀족 가문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충성스러운 가신이자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했습니다. 1687년 신성로마제국의 제후 작위까지 받았는데, 훗날 하이든이 궁정악장으로 머물던 곳이 호수 서편의 아이젠슈타트에 있던 에스테르하지 제후궁이었습니다.

파울 1세 제후는 1683년 제2차 공격의 여진이 가라앉은 뒤 1695년부터 1702년까지 폐허 위에 성모 탄생 성당을 새롭게 지어 봉헌합니다. 그러고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을 초청해 사목과 순례자 사목을 맡겼습니다. 1696년 완공된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은 제후 가문의 재정적 후원 아래 설교와 고해 성사, 빈민 구제를 담당하며 부르겐란트의 신앙 중심이 되었습니다. 귀족의 신심과 탁발수도회의 가난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성모 신심을 꽃피운 것이죠. 지금도 오스트리아 관구의 작은형제회 수도자들이 매년 이곳을 찾는 10만 명 이상의 순례자들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프라우엔키르헨 성모 탄생 순례 성당. 길이 53m, 폭 18.5m, 천장 높이 23m 크기의 바로크 양식 성당으로 주 제대와 8개 측면 제대로 구성되어 있다. 루카 안토니오 콜롬바를 포함한 예술가들이 프레스코화와 치장 벽토 장식을 맡아 곡선미를 살렸다.
프라우엔키르헨 골고타(1759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재현한 조형물로 순례 성당과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손꼽히는 바로크 양식 기념물에 속한다.

일상 속 평원의 성모

마을 넓은 광장에 자리한 순례 성당에는 돔 대신 53m의 쌍탑과 바로크 양식의 파사드가 있습니다. 예전 드넓은 평원 위 흔들리는 갈대밭 속에서 이 성당은 멀리서도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평원의 성모’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성당에 들어서면 23m의 높은 천장이 주는 공간감 속에 스투코·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인데요, 주 제대에는 은총의 성모자상이 피난처를 찾아온 순례자를 맞이합니다. 그 옆에는 헝가리의 두 성왕(聖王)인 성 이슈트반 1세와 성 라슬로 1세가 성모님을 보필하고 있지요. 이는 이곳 부르겐란트가 한때 헝가리 왕국의 땅이었음을 드러낼 뿐 아니라, 성당이 세속의 경계·세속의 환란을 뛰어넘어 신앙의 연속성을 지켜냈음을 보여줍니다.

이곳의 재건은 단순히 무너진 건물의 복구가 아니라 공포를 딛고 폐허 위에 신앙의 터전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매일 그런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순례란 먼 성지를 찾아가는 여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속 상처와 불안을 ‘평원의 성모’ 앞에 맡기고 다시 일어나는 시간, 그것도 일상의 순례일 겁니다.

 
<순례 팁>

※ 오스트리아 빈 75㎞,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55㎞. 빈에서 기차와 버스로는 약 1시간 30분 소요. 빈 중앙역에서 노이지들(Neusiedl am See)역까지 와서 버스(No. 292, 235)나 기차 연결편 이용. 성당 광장에 우마툼 백포도주를 파는 비노텍이 있다.

※ 프라우엔키르헨 순례 성당 미사 : 주일 및 대축일 8:45·10:00·19:00, 평일 08:00(화·목)·19:00(월·수·금·토)

※ 유럽의 다른 순례지에 관한 알찬 정보는 「독일 간 김에 순례– 뮌헨과 남부 독일」(분도출판사 2025)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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