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과 ‘목숨을 바쳐 아내를 사랑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 사랑일까? 감정에서 출발한 사랑이 영혼을 확장시키는 사랑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은 무엇일까?
사랑도 순종도 그 시작과 끝은 ‘나’가 아닌 ‘그리스도’가 근원이요 모델이다. 유비로 선포된 위의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감을 따기 위해선 먼저 감을 바라봐야 하듯, 주님의 선물을 먼저 바라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으로 너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혼인에 담긴 신비는 거룩함 그 자체를 관조할 때, 윤리적 도리나 삶을 짓누르는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는 여유를 얻게 한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라고 했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에페 5,23) 그리고 “남편 여러분, …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에서 그것이 가능함을 명확히 드러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이유는 교회에 당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내어준다는 말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혼인에 관계된 이 말씀들은 ‘처음’부터 혼인의 신적 제도를 지향하는 배우자적 사랑의 정신을 상기시킨 것이다. 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해 “한 몸”(창세 2,24; 에페 5,31)을 이루게 된 그 특별하고도 유일한 관계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에페 5,23) 이 유비는 다른 서간과 함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남자의 머리”(1코린 11,3)를 연결해서 보면 몸은 아내와 동의어로 쓰였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15)에서 몸적-혼인적 교회론을 볼 수 있다. 예수는 머리이자 구원자이지만, 남편은 머리이나 구원자는 아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사도의 설명이 모순처럼 보이는 이유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22절에 동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몸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완벽하고,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순종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준 교회에 해당되지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상호 순종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순종의 근원은 존중이다. 교리서에서는 존중을 인간 사랑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자각하는 것으로 봤다. 한 가정을 구성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 안에서 꽃피우는 자각이다. 존중은 인간 사랑 그 자체의 뼈대가 된 하느님과의 관계에 우리 눈을 열어준다는 것, 즉 다른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모습을 알아보는 시각을 의미한다.
말씀의 육화에는 겸손이 전제되어 있듯 타자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 인간의 인격성을 바라보고 그 인격성 앞에 겸손해야 한다. 즉 인간의 정체성과 그 고유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근원과 분리한다면 자기 자신의 내적 신비와 가까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서로의 몸은 경계선의 벽으로 남을 것이고 혼인의 위대한 신비를 자신들의 것으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겸손함은 사랑의 위대함에 자기 자신을 종속시킴을 뜻한다.”(카롤 보이티와(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랑과 책임」)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