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1486~1570)는 피렌체 출신의 조각가이자 16세기 베네치아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건축가입니다. 그는 베네치아의 명성 있는 화가인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90~1576)와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의 동료였고, 베네치아 매너리즘 건축을 대표하는 산미켈리(Michele Sanmicheli, 1484~1559)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활동했습니다.
산소비노는 청소년기까지 피렌체에서 지내면서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제자로 조각과 건축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스무 살인 1506년 줄리아노를 따라 로마에 가서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안드레아 산소비노로부터 수학했습니다. 산소비노의 원래 이름은 자코포 타티(Jacopo Tatti)였으나 안드레아 산소비노에게 배우면서 ‘산소비노’라는 이름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브라만테의 로마 공방에서 산미켈리를 만나 함께 일했고, 5년 후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 설계 공모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경쟁에서 우승한 미켈란젤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1518년경부터 로마에서 건축가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때 ‘팔라초 조반니 가디’를 설계하였으며, 이어서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의 ‘산 조반니 데이 피오렌티니 성당’과 ‘산 마르첼로 알 코르소 성당’의 설계에 참여했습니다. 산소비노의 로마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로마 고전주의를 익힐 수 있는 귀중한 체험이 되었습니다.
이즈음인 1527년 로마 대약탈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예술가처럼 산소비노 역시 베네치아로 피신하였습니다. 피렌체 출신인 그가 베네치아를 활동 무대로 정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베네치아는 건축 수요가 많았고 그것을 수행할 건축가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베네치아는 매너리즘보다는 웅장한 로마 고전주의를 표현하는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선호했습니다. 그런 베네치아의 시대적 요구에 산소비노가 적임자인 것만큼은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베로나 건축가인 산미켈리도 같은 시기에 베네치아에 있었는데, 그는 건축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현장 중심의 건축가였기에 건축주들로부터 대형 공사를 많이 수주하였지만, 그의 건축은 로마 고전주의의 건축물보다는 성채 공사와 팔라초 공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산소비노는 로마 고전주의를 표현할 줄 아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가 약탈당한 후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건축 유산을 이을 도시가 되었습니다. 많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건축가들이 이탈리아 북부, 특히 베네치아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네치아 지역주의의 성격이 강했던 산미켈리보다는 산소비노가 르네상스의 베네치아 보편주의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산소비노가 베네치아에서 이룬 건축적 성과는 대단했습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산 마르코 도서관(Biblioteca nazionale Marciana)’, ‘조폐국(Zecca)’, 산 마르코 종탑 기단의 ‘로지아’가 있습니다.
마르코 소광장(Piazzetta San Marco)에 접한 도서관 건물은 팔라초 두칼레(Palazzo Ducale)와 평행으로 마주하고 있는데, 도서관의 지붕을 팔라초 두칼레의 지붕보다 낮게 처리하여 팔라초 두칼레를 훼손하지 않았고, 동시에 도서관에 장식 조각상을 많이 설치하여 산 마르코 대성당과 팔라초 두칼레와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는 이 도서관을 ‘산소비노의 도서관’이라고 불렀고, 팔라디오도 고대 이후로 가장 풍부한 장식이 들어선 건물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또한 산소비노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소유한 엄청난 보화를 보관할 조폐국을 도서관과 직각을 이루며 바다를 바라보도록 설계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토스카나식 오더를 베네치아에 처음 도입하였습니다.
산소비노가 베네치아에 세운 대표적인 성당은 ‘산 마르티노 성당(Chiesa di San Martino)’과 ‘산 제미니아노 성당(Chiesa di San Geminiano)’입니다. 산 마르티노 성당은 투르의 주교 성 마르티노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지금도 성인의 축일(11월 11일)이면 산 마르티노 과자를 준비해서 도시를 돌아다니며 축제를 지냅니다.
이 성당은 6세기 말이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산소비노가 전체 구조를 90도 회전시켜서 그릭 크로스의 중앙집중형으로 설계한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입니다. 성당 내부에서 파사드로 나가는 출입구 상부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그 아래에 제롤라모 다 산타크로체(Gerolamo da Santacroce)의 <최후의 만찬>(1549년) 성화가 있습니다.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산 제미니아노 성당은 동로마제국이 라벤나를 포위 공격할 때 베네치아인들이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554~564년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12세기에 산 마르코 광장의 확장으로 산 제미니아노 성당은 산 마르코 대성당의 맞은편 끝으로 이전하여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후 1505년 새로운 성당이 계획되어 공사가 시작되었고, 1557년에 산소비노가 완공하였습니다.
성당 외부의 파사드는 매우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었는데, 중앙에는 페디먼트가 있고, 양쪽에 첨탑이 세워졌습니다. 1층과 2층 모두 코린트식 쌍기둥 네 쌍이 정면을 세 부분으로 분할하여, 가운데 정문이 있고 정문 양쪽에 랜싯창이 정문 상부에는 원형창이 있습니다. 성당 내부는 정사각형의 중앙집중형 평면이며 높은 제단과 경당이 출입구 반대 방향에 있고,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작가 레오니코 골디니(Leonico Goldini)는 산 제미니아노 성당을 보고 베네치아의 다른 성당들과 비교하면서 진주들 사이의 루비와 같다고 극찬하였습니다.
산소비노는 1570년 세상을 떠나 이 성당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1807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을 병영으로 만들었는데, 그때 베네치아 예술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 제미니아노 성당도 철거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성당의 성유물들과 예술품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유실되었고, 산소비노의 무덤도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전쟁은 성당도 평화도 모두 무너뜨립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