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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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종말에 대한 성찰(묵시 16,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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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대접은 일곱 번째 나팔과 닮았다. 번개와 요란한 소리, 지진과 엄청난 우박이 여전히 등장한다.(묵시 11,19 참조) 이집트에 내려졌던 다섯 번째 재앙과 역시 닮았다.(탈출 9,22 이하 참조) 완고함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이집트의 탈출이 실은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의 길이었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재앙들은 믿음의 길을 촉구하는 하나의 호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몇 번이나 되짚었다.


대접이 쏟아지자 성전 안에 있는 어좌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등장한다. 대개 ‘하느님의 목소리’,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이 선포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목소리는 이렇다. “다 이루어졌다.” 이 외침은 단순한 종말의 선언이 아니다. 세상이 끝장난다는 ‘마지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안에 비로소 개입하신다는 외침이다. 


이 외침은 하느님이 등장하는 서사들 안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들, 그러니까 천둥, 번개, 요란한 소리, 지진 등과 함께 묘사되기도 한다.(탈출 19,16; 묵시 4,5; 8,5; 11,19 참조)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통해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창조 질서를 회복한다는 믿음이 “다 이루어졌다”라는 문장 안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좌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이어 ‘큰 도성’이 세 조각으로 갈라진다. 대개의 주석학자는 ‘큰 도성’을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이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차원에서 단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와 이방인의 세상은 은유적 표현이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은유를 통해 인간 세상과 그 역사의 불의와 부패를 가늠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로마와 이방인의 세계는 지금 우리이기도 하겠고, 내일의 우리이기도 하겠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 앞에 어느 민족이, 어떤 세상이 지진과 같은 징벌의 대상이 될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 Girard)가 말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적인 태도로 요한 묵시록의 징벌을, 세상의 불의를 살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에게 세상의 잘못과 부패를 온전히 덮어씌우고 희생양으로 만들어서 그 특정 민족과 국가,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평화와 안정을 꾀하는 자세 말이다.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로마 혹은 그 이전의 바빌론이라는 국가는 역사적 실재이나 그것이 오늘날 여전히 악의 축인 것인 양 이해하면서 마치 특정 세력이 악하므로 그 특정 세력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철없는 의로움은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 놓고 ‘세속’에 따라 살지 말자는 외침을 함부로 남발하는 신앙은 하느님을 따르는 의로운 길이 아니라 제 이데올로기를 사수하는 선동가의 아집일 경우가 많다. 



교회든 세상이든, 하느님 입장에선 당신의 섭리가 펼쳐져야 할 하나의 공간이다. 교회는 우주 만물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고 그분의 정의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가진 공동체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저만의 무릉도원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형제적 공동체다.


하느님은 ‘대바빌론을 잊지 않으신다’(묵시 16,19 참조)는 문장 역시 이러한 교회의 참모습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은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에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이미 확고히 제 자리를 잡고 있는 것들, 예컨대 모든 섬과 산이 자취를 감출 만큼 결정적이다.(묵시16,20) 


교회가 세상 속 하느님의 정의를 알리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면, 교회 역시 권태로운 타협이나 눈치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고, 저만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기대어 세상을 등져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더 이상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새롭게 태어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경고하고 움직여야 한다.


사실, 세상이라는 곳은 견고한 시스템과 복잡한 사상들이 얽혀 있는 곳이라 어느 하나도 쉬이 돌아서거나 변화되긴 힘들다. 21절에 엄청난 우박이 떨어져도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것은 그러한 세상의 완고함을 대변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박의 무게가 한 탈렌트인데, 26~36kg의 무게다. 이 무게는 로마군이 쏘아 올린 투석기에 담긴 돌의 무게와 일치한다. 


 


재앙 묘사는 종말의 의미 아닌


악의 지배 질서를 심판하시고


세상에 당신의 섭리 펼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 담긴 표현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 할 때 쏘아 올린 그 투석기의 돌이 한 예다. 유다 사회는 로마의 그러한 군사적 행동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요한 묵시록이 쓰여지는 때 여전한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박이라는 재앙을 로마 군대의 투석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재앙이 그만큼 무섭고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


사람들의 모독이 그리 단단하고 두꺼운 것이므로 사람들의 죄악이 그만큼 독하고 무겁다는 식으로 해석하기엔 성급하다. 큰 도성이 갈라지는 일이 벌어져도, 우박이 매섭게 이 땅 위에 떨어져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 익숙해져 있고, 익숙한 만큼 변화를 싫어한다.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도 온 나라가 갑론을박의 긴장과 그로 인한 피로감에 젖어 들게 마련이다. 


요한 묵시록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사실을 특정 불의나 구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데서 찾지 않는다. 이어지는 17장부터 바빌론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그것은 일상의 경제적, 정치적 체계를 드러낼 뿐이다. 로마가 특별히 악한 것이 아니었고, 로마가 유독 잘못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로마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요한 묵시록 저자의 입장에선 하느님의 뜻을 반한다고 여긴 하나의 ‘해석’ 이야기다.


결국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은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익숙함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익숙해서 다른 것과 낯선 것에 귀와 마음을 닫고 있는 일들 말이다. 가까이는 내 이익을 위해, 멀리는 거대 담론을 무턱대고 수용한 무지하고 성급한 사상들을 위해 타인과 그의 다름을 무작정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완고한가, 유연한가. 요한 묵시록이 끝나기 전에, 우린 그 답을 찾아낼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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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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