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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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서울 달동네에서 ‘사랑·봉사의 길’ 찾은 의사 선우경식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가난한 이들의 의사, 선우경식 요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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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봉천10동 ‘사랑의 집’ 앞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주민들.



자신이 가야 할 ‘의사의 길’ 
돈 없으면 의료 혜택 못 받던 때 
정선 성프란치스코에서 3개월 봉사 
가난한 환자들 위한 의사 다짐 

달동네 의료봉사 
무허가 건물 즐비한 가난한 동네 
매주 토요일이면 의료봉사 다녀 
위급한 환자 있으면 언제든 달려가 






서울 신림10동 ‘사랑의 집’

1984년 여름.

“선우 선생님, 신림10동 ‘사랑의 집’ 봉사자입니다. 이 동네에 조금 전에 아이를 낳은 산모가 있는데, 상태가 심상치 않아 전화를 드렸습니다. 병원엘 가려 해도 돈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께서 지금 바로 왕진을 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서울 신림10동은 1970년대 초 정부의 무허가 주택 강제철거 정책에 밀려난 철거민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형성된 동네로 약 4~5만 명이 살았다. 주민들 대부분은 막노동·행상·파출부 등의 일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 주위로 빽빽이 들어선 2~3평의 방에서 5~6명의 식구가 월세를 내며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신림10동의 열악한 생활환경이 알려지자,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노엘 매키(Noel Mackey) 신부와 크리스토퍼 패렐리(Christopher Farrelly) 신부가 1981년 신림10동에 조그만 집을 얻어 ‘사랑의 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가난한 사람을 돕기 시작했다. 화장실은 드럼통을 파묻고 나무판자로 발판을 만들어 사용해야 하는 허름한 집이었다.

사랑의 집은 봉사자들이 팀을 나눠 밥과 음식을 만든 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찾아가 나눠주는 등 주민들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봉사자 선생님, 지금 환자 상태가 어떤지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온몸이 부어올랐고 숨도 매우 가쁘게 내쉬고 있습니다.”

“예, 그럼 제가 택시 타고 얼른 가겠습니다.”



주말 의료봉사

매주 토요일 ‘사랑의 집’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선우경식(요셉)은 근무하는 병원에 양해를 구하고 왕진 가방에 청진기와 혈압계 그리고 몇 가지 주사제와 약을 챙겨 병원을 나섰다. 신림10동은 신림사거리에서 10여 분을 더 가야 하는 곳으로 산등성이에 판잣집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택시에서 내린 그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 사랑의 집 입구에 도착하자,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던 봉사자가 빠른 걸음으로 환자의 집으로 안내했다. 좁은 방안에는 장롱이 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갓난아기 외에도 아이들 세 명이 더 있어 그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는 봉사자에게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게 한 후 진료를 했다.

산모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보니 심장이 약했다. 심장판막증으로 인공 판막을 달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으려고 힘을 쓰니까 심장에 무리가 간 것이었다. 그가 강심제(디곡신, digoxin)와 이뇨제(라식스, Lasix) 주사를 놓자 잠시 후 산모는 안정을 찾았다. 선우경식은 잠시 상태를 살펴보다 준비해온 약 가운데 몇 가지를 골라 산모에게 주면서 복용 방법을 설명하고 밖으로 나왔다.

“봉사자 선생님, 이제 진정이 되었고 약을 드렸어요. 산통으로 심장에 무리가 가서 그랬던 거라 약을 먹으면 괜찮겠지만 심장이 워낙 약한 분이라 상태를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당분간은 선생님이 신경 좀 써주시고, 만약 다시 상태가 안 좋아지면 얼른 저에게 연락하세요.”

“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가 아이들에게 엄마 이제 괜찮다고 하자 그의 입만 바라보던 아이들은 얼른 방으로 뛰어갔다.

선우경식은 며칠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산모에게 들렀다. 다행히 산모는 건강을 되찾았고, 수술하지 않고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1983년 여름, 강원 정선 성 프란치스코 의원 입구에서 수녀, 간호사, 직원들과 함께. 뒤에 보이는 흰 건물이 의원이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한국관구 제공


정선에서의 봉사와 의사 역할에 대한 고민

그가 사랑의 집으로 진료 봉사를 다니게 된 계기는 지난해 강원도 정선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의원에서 3개월 동안 봉사자와 다름없는 조건으로 근무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의사의 길’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성 프란치스코 의원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지역주민들을 위해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1976년 개원한 후 하루에 약 80~100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는 지역 병원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소아과 전문의 자격증이 있는 안 마리(안느 마리 퀴냉 Anne Marie Cunin, 1941~) 원장 수녀가 3개월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사정이 생겨 선우경식이 지원해서 근무했다.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그가 강원도 정선으로 간 이유는 서울에서의 의사 생활에 대해 많은 갈등이 있어서였다. 당시엔 국민건강보험이 없고 큰 기업에만 의료보험이 있던 시절이라 접수할 때 미리 수술비나 진료비를 내야 했기에, 가난한 환자 중에는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우경식은 진료도 받지 못하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서는 환자와 가족들을 보며, ‘이런 상황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가난한 탄광촌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성 프란치스코 의원에서 단기 근무할 의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자 대학병원을 휴직하고 강원도 정선으로 내려간 것이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어주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자 하는 성 프란치스코 의원은 환자의 경제 사정에 따라 30~70 정도 할인해주거나 몹시 가난한 환자에게는 아예 돈을 받지 않으면서, 가난한 산골 주민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한다는 수녀회의 취지를 살려가고 있었다. 물론 수녀회의 지원도 있었지만, 의사인 원장 수녀와 간호사 수녀, 임상병리사 수녀의 월급이 나가지 않을 뿐 아니라, 꼭 필요한 검사나 투약만 해서 진료비와 처방 약값을 저렴하게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랑과 봉사의 조화 체험

선우경식은 3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사랑과 봉사가 조화를 이룰 때 가난한 환자들도 의료 혜택을 볼 수 있다는 걸 보고 느꼈다. 그는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숙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서울로 올라와 ‘사랑의 집’에서 주말 봉사를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의 집 앞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가톨릭 의대의 전문의들과 몇몇 레지던트도 번갈아 가며 참여했다. 진료가 체계를 잡아가자 크고 작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사랑의 집으로 찾아왔다. 70~80명의 진료 환자 중에는 약만으로는 안 되고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 맹장 수술이 필요한 사람, 아기가 거꾸로 들어선 임신부, 결핵에 걸린 사람들도 있었다.

선우경식은 그때마다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이나 동창 의사들에게 전화해서 저렴한 가격으로 입원이나 수술을 부탁하고, 자신의 월급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런 임기응변식 진료가 아닌, 보다 체계적인 진료 봉사 체계를 갖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 갔다.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이충렬(실베스테르) 작가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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