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가한 이들이 발표를 듣고 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1일 대구대교구 주교좌 범어대성당 드망즈홀에서 ‘이 땅으로의 초대, 그 부르심의 힘으로’를 주제로 열렸다. 수도자들은 심포지엄을 통해 100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수도생활의 정체성과 본질을 성찰하며, 시대 요청과 당면 과제를 살폈다.
대구수녀원장 이일경(베타니아) 수녀는 “초창기 수녀님들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르면서도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으셨고, 그 시간과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큰 힘이 됐다”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라보면서 겸손과 온유로 쇄신의 삶을 살아야 함을 되새겼다”고 말했다.
심포지엄에는 툿찡 수녀회 대구수녀원과 서울수녀원 수도자와 봉헌회원,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 수도자를 비롯해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총대리 장신호 주교,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고성수도원 대수도원장 유덕현 아빠스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수녀회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이현미 수녀가 발표를 하고 있다.
툿찡 수녀들 조선을 품다
첫 번째 발표자 김정숙(아기 예수의 데레사) 영남대 명예교수는 수녀회 3기 봉헌회원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툿찡 수녀회의 다양한 사도직 가운데 교육과 의료 분야에 깃든 인연과 역사를 중점적으로 살폈고, 대구 수녀원의 특징과 토착화 과정을 설명했다.
김 교수는 1925년 툿찡 수녀회가 원산에 진출할 때 한국이 처한 시대 상황을 언급하면서 “수녀들의 교육은 영혼 구원이 일차적 목표이긴 했지만, 조선 여학생에게는 세상으로 나갈 문을 여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또 “독일 출신 의사였던 디오메데스 수녀는 한국의 환자를 돌보기 위해 일본·북조선·남한의 의사 면허를 모두 취득하고 한센병 환자들도 성심껏 돌봤다”면서 “그를 만난 이들은 병을 이겨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며 ‘작은 디오메데스’가 돼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수녀회 정착과 발전에 헌신했던 수도자와 은인의 삶과 활동을 되짚으면서 수녀회의 미래를 위해 ‘숨은 회원’ 발굴을 제안했다. “고정된 회원 개념에서 벗어나면 수도원을 돕고 사명을 함께할 ‘숨은 회원’들이 많다”며 봉헌회원, 학교 졸업생 및 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와 가족, 지인, 봉사자들과의 동반을 조언했다. 김 교수는 “새로운 활동을 하지 않으면 활력을 잃는다”며 앞으로 과제로 툿찡 수도자들이 순교 영성과 순교 현양 사도직에 나서고, 북한 실향민의 고향이 돼주는 일에 나서길 제안했다.
구원의 서사 이어가기
겔트루드 링크(1908~1999) 수녀는 1939년 툿찡 수녀회에 입회한 지 4개월 만에 한국 원산 수녀원에 파견됐다. 1949년 공산군에 체포된 링크 수녀는 옥사덕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하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됐다. 한국을 사랑했던 링크 수녀는 한국으로 재파견을 요청했고, 2년 뒤 대구수녀원 수련장을 지냈다. 강제 수용소 시절 겪었던 삶과 고통을 시로 남겼는데, 이 시들은 독일에서 시집 「암흑과 폭풍 속의 너 영혼아!」로 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현미(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수녀는 구약의 시편과 링크 수녀의 시에 담긴 ‘구원의 서사’에 주목하며 수녀회 정체성과 본질을 성찰했다.
이 수녀는 “링크 수녀의 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구약 시편은 모두 하느님의 구원 서사 안에서 만난다”면서 “링크 수녀의 시를 읽고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그가 굶주림과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의 구원사적 서사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이렇게 감동을 주는 우리만의 성찰 기록과 영적 유산을 남기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면서 외적 성과를 하느님 축복과 동일시하는 ‘번영신학’의 해석을 경계했다.
이 수녀는 “우리의 소명을 지탱하는 것은 성취해 낸 결과물이 아니라 강렬한 하느님 현존의 체험”이라며 “은총과 감사의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치부까지도 반성하고 기록하며 각자는 물론 공동체가 함께 구원의 서사를 써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체성과 인간성 회복해야
허성석(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신부는 시대 적응과 관련해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면서 “틀과 형식은 변할 수 있어도 정신과 가치는 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또 “규칙이나 회헌의 규정 자체가 아니라 그 규정의 정신을 지향해야 하고, 그 모든 바탕은 복음 정신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허 신부는 또 개인주의와 세속주의가 현대 수도생활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자 공동체성 회복의 걸림돌임을 지적하면서 “개인주의 극복은 자기 것을 내려놓는 것이며, 이를 내려놓지 못하면 참된 공동체를 건설해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베네딕도회의 특징을 강조하면서 “공동체는 우리 활동이 힘을 얻는 원천이 돼야 한다”고 했다.
허 신부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영성이고 뭐고 가장 중요한 것은 평범하고 상식적인 인간이 돼야 한다는 점”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수도자이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돼야 하고, 그리스도인에 앞서 인간이 돼야 한다”면서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는 것이고, 이는 곧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도생활의 미래는 ‘생존이 아닌 존재의 문제’라고 진단한 허 신부는 “어떻게 살아남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며 복음을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 수도생활의 일차적 역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일깨웠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전경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창설자 안드레아스 암라인(1844~1927, 독일 보이론 베네딕도 대수도원) 신부는 기도와 노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할 해외 선교의 필요성을 느껴 ‘수도승이자 선교사’로 활동할 수도회를 설립했다. 성 베네딕도 수도 정신에 선교 이념을 더해 1884년 남자 베네딕도 수도회를, 1885년에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를 설립했고 1900년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정식 수도회로 인정받았다. 툿찡은 모원 수녀회가 있는 독일 지역 이름이다.
툿찡 수녀회는 1925년 11월 21일 네 명의 독일 선교사 수녀를 한국에 파견했고, 수녀들은 함경남도 원산에 수녀원을 세워 한국인 수녀를 양성했다. 더불어 유치원·학교·무료 시약소·진료소 등을 운영하며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돌보며 하느님 사랑을 전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공산정권 치하에서 원산 수녀원은 폐쇄됐고 수도자들은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 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때 사망한 독일인 수녀 2명과 한국인 수녀 2명은 하느님의 종 38위에 포함돼 시복시성이 진행 중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수도자들은 남한으로 피난했고, 대구에 정착해 수도생활과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특수교육기관·여성교육시설·무료 진료소·병원 등을 설립해 사회 약자들을 찾아 나서며 돌봤다. 본당과 교구 공동체, 해외 선교지에도 수도자들을 파견해 복음을 전했다. 1956년 대구 수녀원은 원장좌 수녀원으로 승격됐고, 1987년 서울에 새 원장좌 수녀원을 설립했다. 한국 진출 100주년을 맞은 올해 수녀회는 대구에 청년들을 위한 ‘청년밥상 베네’(9월)와 창원에 마리아의 도움 이주민 무료 진료소(11월) 문을 열며 100년 전 독일 선교사 수녀들이 한국 땅에서 시작한 활동을 새롭게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