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죽산성지’라 새겨진 큰 돌을 만난다. 성지 초입이다. 이곳에서 성지까지는 800여m. 포졸들에게 잡혀 와 죽산 관아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초주검 된 신자들이 처형 터로 향하던 그 길이다. 죽주산성을 마주하는 이곳은 고려 때 원나라 군사가 진을 친 곳이어서 ‘이진(夷陳)터’라 불렀는데, 박해시기 ‘잊은 터’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훗날 신자들은 그 자리에 성지를 세워 기억의 공간으로 삼았다. 24위 순교자와 이름 모를 무명순교자들이 잠든 죽산순교성지(전담 이해윤 루도비코 신부)는 위령성월을 맞아 순교자를 기억하기 위해 발걸음을 한 순례자들 덕분에 가을 햇살 아래 더욱 빛나고 있다.
잊어야 하는 터, 기억해야 할 터가 되다
성지 대문은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성역(聖域).’ 성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의 현판을 단 큰 문루를 넘어서자 넓은 잔디광장 너머로 순교자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성지는 대문을 중심으로 기와를 얹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쪽으로 묵주기도의 길, 순교자 묘역, 십자가의 길이 정갈하게 배치돼 있다. 봄이면 꽃들이 만개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수놓여 사시사철 아름다운 성지는 이제 잊은 터가 아닌 기억에 남는 터가 됐다.
담벼락 끝에 자그마한 십자가가 보인다. 성지 대성당이다. 초가집을 연상케 하는 황토색 벽에 검은색 기와를 얹은 소박한 모습이다. 성당은커녕 함께 모여 기도할 공간조차 없었을 신앙 선조들을 대신해 오늘 순례자들은 성당 안에서 순교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대성당 앞에 앉으면 성지 전체를 올려다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해 고된 길을 걸었을 신앙 선조들을 떠올리며 새롭게 지어진 아름다운 마을에서 고통받지 않고 마음껏 하느님 사랑을 느끼길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다.
성당을 나와 오솔길을 오르면 순교자 묘역이다. 중앙의 무명 순교자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에 병인박해 24위 순교자 묘와 현양탑이 대칭을 이룬다. 순례자들이 피의 순교를 체험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순교자 묘는 성지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묵주기도의 길에서 성모 신심을, 묘역에서 순교 신심을 묵상한 순례객은 마지막으로 소성당에서 성체조배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체험한다.
성지를 찾은 민영문(스테파노·인천교구 중3동본당) 씨는 “다른 어떤 성지보다 순교자 묘역을 잘 조성해 놓아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며 “소성당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를 바라보고 기도할 수 있어 올해 위령 성월이 더욱 뜻깊었다”고 말했다.
순교자 피로 물들었던 처형 터, 성지로 거듭나다
죽산은 삼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임진왜란 이후 전략 거점으로 평가돼 1595년 도호부로 승격됐다. 병인박해(1866년) 때 도호부사는 토포사와 영장을 겸임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신자를 체포했다. 작은 고을이었지만, 그 박해 속에 죽산에서는 22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당시 이곳에는 처형장이 있었다. 삼남에서 서울로 향하는 큰길가에 자리해 행인의 왕래가 잦았고, 누구나 처형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관헌은 신자들뿐 아니라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경각심을 주기 위해 공개된 자리에서 잔혹한 형을 집행했다.
기록에는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가족이 함께 순교한 사례도 남아 있다. 충북 진천 절골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체포돼 죽산 관아로 끌려온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가 그중 하나다. 당시 조선의 법은 가족을 동시에 처형하는 것을 금했으나, 병인박해의 광풍 속에서는 이런 비극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여정문(1867년 순교)은 아내와 15세 아들과 함께, 최성첨(1868년 순교)은 아들과 함께 한날한자리에서 목숨을 바쳤다.
순교자의 피로 얼룩진 그 자리에 성지 조성이 본격화된 것은 46년 전이다. 1979년 제1대리구 죽산본당은 ‘죽산성지 조성 추진위원회’를 발족해 병인박해 순교지 ‘잊은 터’를 성지로 가꾸기 시작했다. 순교 터 위치를 확인하고 사료를 수집한 본당은 1994년부터 2만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며 조성 사업에 속도를 냈다. 이어 1997년 6월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해 같은 해 12월 14일 봉헌식을 거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