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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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유리알] 오늘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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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친구를 보며 장난스럽게 ‘눈싸움’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눈물이 날 때까지 바라보다 깜빡이면 지는 게임. 그때 나는 친구의 솜털 같은 눈썹과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 존재를 주시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쳐다봄’이 아니라, 신비였다. 그 응시는 사회적으로 약 3초에서 5초 정도 허용된다고 한다. 물론 이와 달리 사랑하는 사이의 눈 맞춤은 길면 길수록 친밀감이 더하고….



캐나다의 사실주의 화가 알렉스 콜빌(Alex Colville, 1920~2013)이 있다. 그는 일상을 그린 작품에 기묘한 불안과 긴장을 잘 숨긴다.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 그리고 ‘정지된 순간’이,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내적인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작품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1965)에서는, 항해 중인 배 위에 한 여성이 쌍안경을 들고 바다가 아니라 관객을 보며 서 있다. 쌍안경의 렌즈가 나를 향할 때 그 시선은 도발적이게 된다. 어쩌면 ‘존재를 응시한다’는 건, 감시와 애정 사이에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닐까.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성당 근처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이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이른 아침 성당 마당에서였다. 가끔 직장인들이 성당에 와서 커피를 마시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하루에 세 번 그녀를 보러 왔으니까. 출근하기 전에 한 번 보러 왔고, 점심때도 틈을 내 다녀갔으며, 퇴근하는 길에는 성당 철문이 닫혔어도 문밖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로 성당 마당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바뇌의 성모상이었다. 벨기에 산골 마을 바뇌에서 ‘마리에뜨’라는 소녀에게 여덟 번 발현하신 성모님은 마지막 발현 때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원하셨다. 사랑은 머무는 시간에 비례한다. 때때로 그는 성당 뜰에 놓인 벤치에서 뭔가 풀리지 않는 듯 깊은 생각에 빠졌는데, 그러다 사라지면 성모상 앞에 서 있곤 했다. 누가 보면 성당에 사는 사제보다 성모님을 더 지키는 것 같았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그가 성모상 앞에 설 때마다 그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아 신자들은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살금살금 다녔다. 나는 그 신태하 미카엘 형제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제님, 이렇게 오시는 데는 무슨 사연이 있으신가요?” 그는 순하고 조용했으며 수줍은 사람이었다.


“무슨 사연이라기보다, 우연히 그렇게 됐습니다. 여러 성당을 다녀봐도 여기만큼 성모님이 단아하고 아름다운 분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퇴근할 때만 잠시 뵈었지요. 그때는 성모님을 만나기 위해 성당에 온 것이 아니라 귀가 전에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저녁에 오다 보니, 아침에도 오게 되고 저녁, 아침, 점심, 이렇게 성모님 앞에 자주 서게 된 겁니다.”



마음이 가서 자꾸 또 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자주 보니까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나는 묻고 싶었다. 성모님 앞에 서면 기도 외에도 어떤 기분이 드는지. 성모님도 그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분 앞에 서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어머니의 품과 같은 감미로움이 느껴집니다. 그만큼 따뜻한 곳이 없지요. 물론 성당에 오면 편안함이 있지만요. 저는 여기 성모님을 뵐 때부터 제 온몸이 포근하게 안기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경에서 제자들이 거룩한 변모를 한 예수님 앞에서 횡설수설했듯이(마태 17,4 참조) 그 순간 제 머릿속에 있는 모든 기도들을 고백하게 됐지요.”


꾸밈없는 그의 모습에 나는 다시 궁금해졌다. “그러면 기도하면서 일상의 변화도 있었나요?” 그가 말했다. 


“이렇게 5년 반 동안 같은 방식으로 매일 기도를 했습니다. 대개 가족들이나 하는 일에 대한 기도였지요. 기도를 통해 어떤 신비로운 기운을 느꼈다기보다는 잔잔한 변화들이었습니다. 원래 저는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다음 일을 못 했지요. 예전 같았으면 그것을 풀기 위해 혼자 노심초사했을 텐데 지금은 자동으로 ‘뭐가 풀리지 않아? 그럼, 성당에 잠시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다녀오면, 술술 일이 잘 풀리는 일상의 작은 변화를 체험합니다. 제가 점심에도 자주 성당에 가니까 밥 먹으러 가자는 동료들도, 으레 ‘성당 갈 거지?’ 합니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에서 화가 알렉스 콜빌은, 한 장의 그림을 사이에 두고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과 그림 속 쌍안경을 든 여인이 보이지 않는 교감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당신만이 아니라 ‘나도 당신을 보고 있다’는 서로의 응시.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 세 번씩 자신을 보러 오는 한 사람을, 성모님도 기다리고 계시지 않겠는가.’ 그는 말했다. “성모님 앞에 서 있으면, 그분도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그 앞에 가기 전에,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저에게 아내는 ‘자신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아마 사제가 됐을 거’라고 그래요.”


오늘도 성당 마당에는 성모상이 그대로 서 있다. 그러나 그는 올 수가 없다. 가끔 나는 빈 성당에서 그를 찾는다. 이제는 강원도의 한 부대로 전출한 그에게, 나는 오랜만에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했다. 강원도의 맑은 공기와 같은 청량한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렸다. 한결같이 그는 일요일이면 군인 성당에서 미사드리고, 가끔 성당 청소 후에 군종 신부님이 사주시는 짜장면을 함께 먹는다고 했다. 


가족들을 떠나 혼자 근무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그에게 가볍게 물었다. “미카엘 형제님, 여기에서처럼 그 성당에서도 매일 성모님을 만나고 계시나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부대와 성당이 거리가 있어서 퇴근길에만 들립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순간 그리움이 느껴졌다.


나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진정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으니, 분명 바뇌의 성모님도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찾아주던 그를 그리워하고 계실 거라고….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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