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근 신부가 2012년 칠레 남부 마푸체 지역 오소르노교구의 한 공소에서 신자들과 기도를 바치고 있다. 전기와 수도가 없어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서 기도문을 봐야했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제공
잘난 체하다 여러 번 가슴 쳤지요
인내와 겸손 그분들이 삶으로 보여줘
‘선교 하러’ 갔다가 ‘선교 받고’ 온 것
내가 얼마나 바보 같고
잘난 척하는 사람인지 깨달으며
겸손해지는 게 선교사의 삶 같아
그러면서 인간이 되고
하느님께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죠
사람들이 이미 품고 있는 하느님 사랑
어떤 방식으로 나누며 사는지
배우고 깨닫는 게 선교 아닐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지부는 1일 서울 돈암동 선교센터에서 특별한 미사를 봉헌했다. 남미 칠레에서 33년간 선교하고 돌아온 김종근(도밍고) 신부를 위한 감사미사였다. 김 신부는 골롬반회 첫 한국인 사제(1993년 사제수품)이자 한국지부가 해외 선교사로 파견한 첫 사제다. 칠레에서 잠시 귀국해 한국지부장(2015~2018)을 맡았을 때, 그는 골롬반회가 1933년 한국에 진출한 지 82년 만에 배출한 첫 한국인 지부장 신부였다. ‘1호’라는 소개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그의 선교 여정은 골롬반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이정표였다. 선교사로서의 그의 삶을 더 자세히 들으려 6일 골롬반회 선교센터로 찾아갔다.
칠레 얘기만 하면 눈물…마음은 아직 칠레에
김 신부는 칠레에서 선교 사제로 살다 칠레 땅에 묻히고 싶었다. 인생이 늘 그렇듯 모든 게 뜻대로 되진 않았고, 결국 올해 여름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비자가 가장 큰 문제였다. 5년마다 갱신해오던 비자였는데, 재작년에 갑자기 비자 연장을 거절당했다.
“지금도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관공서에 이유를 알려달라 편지를 썼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죠. 공무원들은 ‘모른다’고만 하고요. 비자가 없으니 3개월마다 칠레를 벗어났다 들어오기를 반복해야 했어요. 무비자 입국은 90일까지만 인정되니까요. 국경과 맞닿아 있는 볼리비아나 페루에 다녀왔죠. 하룻밤 만에 돌아오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 간 김에 쉬자 하면서 일주일간 머물다 오기도 했습니다.”
30년 넘게 ‘내 나라’로 여기며 살았는데, 90일마다 강제로 나갔다가 돌아와야 하는 처지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지냈는데!’라는 생각에 인간적인 섭섭함과 서운함도 몰려왔다. “국경을 넘나들 때마다 이런 상황에 마음이 아팠고, 떠날 때가 된 건가라는 생각에 슬펐다”고 말했다. 그의 눈엔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뜻인가 싶었어요. 여러 고민과 논의 끝에 귀국하긴 했는데, 여전히 칠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그립고 보고 싶어요.”
그는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3년간 칠레 북부 사막지대에서 지냈다. 사람들에겐 “한국에 잠시 휴가를 다녀오겠다”고만 하고 떠나왔다. 칠레로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김 신부는 “그분들은 제가 다시 돌아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평소에도 눈물이 많으냐고 물으니 “전혀 아니다”라면서 “원래 엄청 강한 사람인데 칠레 이야기만 하면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종근 신부가 귀국 전 살았던 칠레 북구 이끼께교구 사막지역 마을 전경. 지붕도 없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절 이웃국가 난민들이 사막 한가운데 집을 짓고 살면서 난민촌이 형성됐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제공
서울 돈암동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센터에서 만난 김종근 신부. 김 신부는 "칠레 사람들이 그립고 보고 싶다"고 했다.
2008년 칠레 남부 리아츄엘로 본당 주임 시절, 미사에 온 신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김종근 신부.
비자 연장 거절로 귀국
김 신부는 골롬반회 첫 한국인 사제이자 처음으로 해외에 선교사로 파견된 사제였다.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칠레로 떠난 김 신부는 수도 산티아고 도시 빈민, 남부 마푸체 원주민, 북부 사막도시 빈민·난민과 함께 지냈다. 칠레는 부정부패에 더해 극심한 빈부 차이와 교육 격차로 대부분 주민의 삶이 어려웠다. 그는 골롬반회 사명에 따라 지역 교회와 공동체 성장을 도우며,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속에서 살았다. 지역 관료의 횡포에 맞서 마을 주민과 연대해 싸우기도 했고, 아이들이 기술을 배우거나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알려주는 데도 힘썼다. 문화·역사·언어·생활방식의 차이로 생기는 우여곡절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선교사로서 함께 웃고 울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칠레는 사제가 부족한 편이라, 저도 파견된 교구에서 대부분 본당 두세 곳을 같이 맡았어요. 지역이 넓으니 본당에 딸린 공소도 많았고요. 제가 떠나도 사람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방인 선교사로서 지역민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하려 무던히 노력했다. 겸손·인내·자기 비움은 선교사 양성 교육 내내 훈련받은 가치였고, 그 역시도 후배 선교사를 양성할 때 가장 강조하는 덕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살다 보면 ‘그래도 내가 신부인데’ ‘그래도 내가 더 많이 배웠는데’ ‘그래도 내가 돈 좀 더 있는데’라는 생각이 눈빛으로, 태도로, 말투로 드러나곤 했다. 그는 “선교한다고 잘난 체를 하다 여러 번 가슴을 치곤 했다”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남부지역에 살 때였어요. 마을에서 누가 죽으면 집에서 장례를 지내거든요. 집에 관을 모셔두면 사람들이 찾아 와요. 그럼 관 옆에 앉아서 몇십 분씩, 몇 시간씩 말없이 있다가 가는 거예요. 세상을 떠난 이와의 시간을 돌이켜 보고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하며 애도하는 거였어요. 저는 그 침묵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한국의 연도 방식을 빌려서 여럿이 모여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고, 복음을 읽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연도책까지 만들어 돌렸어요. 한마디로 잘난 체를 한 거죠. 사람들은 ‘신부가 저렇게까지 하는 데 따라 주자’는 마음으로 함께했지만, 실은 불편했던 겁니다. 제 방식을 따르지 않았던 공소 회장님이 계셨는데, 제가 틈만 나면 그분 욕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김 신부는 “2년 정도 지나서야 사람들이 장례 때 개인적으로 갖는 침묵의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를 넌지시 알려줬다”면서 “그 문화를 진심으로 깨닫고 나니 너무나 부끄러웠고, 모든 걸 참아주고 기다려 준 신자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선교를 ‘하러 간다’고 하잖아요. 아니에요. 저는 선교를 ‘받고’ 왔어요. 선교사인 제가 깨닫고 변할 때까지 오히려 그분들이 참고 기다렸어요. 어딜 가도 그랬어요. 인내와 겸손을 그분들이 삶으로 제게 보여주셨죠. 매번 가슴을 치며 ‘내가 인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구나’라고 뉘우치면서 지금까지 왔고요. 내가 얼마나 바보 같고 잘난 척하는 사람인지를 깨달으며 겸손해지는 게 선교사의 삶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인간이 되고, 하느님께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거겠죠.”
“선교 하러 갔다가 선교 받고 와”
김 신부는 앞으로 어떤 소임을 맡게 될 지 아직 정해진 게 없다고 했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니 칠레에서 비자를 받을 수가 없다면, 페루에 가서 선교사로 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칠레에 있는 듯했다. 그에게 후배 선교사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하느님께선 인간 모두를 사랑하시잖아요. 믿는 사람만 사랑하는 분이 아니시죠. 지내고 보니 내가 느끼고 알고 있는 하느님 사랑을 나누기보다는 예수님을 알든 모르든 사람들이 이미 품고 있는 하느님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나누며 사는지를 배우고 깨닫는 게 선교라고 생각해요. 그런 자세라면 선교사로서 더 좋은 모습이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못한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