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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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영성의 부활 이끈 독일 보이론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

[중세 전문가의 간 김에 순례] 50. 독일 보이론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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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론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 보이론은 슈바벤 지방의 해발 625m의 도나우강 상류 계곡에 있는 인구 700여 명의 조그마한 마을로, 도나우강을 따라 남부 독일 순례지를 잇는 ‘도나우 산티아고길’ 구간에 있다. 1863년 마우루스와 플라치두스 볼터 형제가 폐허가 된 보이론 수도원을 인수해 공동체를 세웠다. 1887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으며, 마우루스 볼터가 초대 아빠스로 선출됐다.

독일 근대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습니다. ‘세속화’란 용어인데요. 19세기 초중반,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전쟁에 패해 라인강 서안의 땅을 빼앗기자, 제후 주교·아빠스가 다스리던 라인강 동안의 성직자령과 수도원을 해체해 그 재산과 영토를 국가로 귀속하여 제후들에게 보상하려고 펼친 정책이었죠.

세속화 정책으로 독일 교회는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잃고, 수많은 수도원이 문을 닫게 됩니다. 동시에 수도원에서 이어져 온 학문·기도 전통도 단절되고 말지요.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도나우강 상류의 조그만 마을 보이론에서 다시금 수도원 영성의 숨결이 되살아납니다.
성 마르티노 수도원 성당.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담황색 박공 벽 위에 성 마르티노가 거지에게 망토를 나누어 주는 대형 벽화가 중심을 이룬다. 아래에는 세 개의 반원 아치 현관이 열리고, 그 위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거처를 거룩하게 하셨다”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의 종탑이 전체 구도에 균형을 더한다.

도나우강 상류의 천 년 역사 수도원

슈투트가르트에서 튀빙겐을 지나 1시간 30분을 달리면 도나우강이 굽이치는 골짜기 한가운데로 붉은 지붕을 한 웅장한 베네딕도회 수도원 건물이 다가옵니다. 수도원 정문 앞에 18세기 중엽에 세워진 도나우강 목조다리가 있는데요, 이곳의 역사는 그보다 한참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11세기 초 이곳에 아우구스티노회 의전사제단이 설립되어 도나우강 상류 일대의 신앙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중세 후기에는 도서관 필사로 유명했고, 17세기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건물을 증축하며 한층 번영했지요. 그러나 1803년 세속화로 수도원이 해산되어 창고와 공터로 변해버립니다.

1863년 겨울, 마우루스 볼터와 플라치두스 볼터 형제 신부가 버려진 수도원 건물에 십자가를 세우고 첫 미사를 봉헌합니다. 형제는 쾰른대교구의 사제로, 젊은 시절부터 신학과 전례·수도원 영성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독일 수도원을 재건할 결심으로 쾰른을 떠나 로마 성 밖 바오로 대성전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수도규칙을 익히다가 보이론으로 와 수도원 영성의 불을 지핀 겁니다.
보이론 목조다리. 도나우강을 건너는 목조다리는 18세기 아우구스티노회 시절에 처음 놓였으며, 세속화 이후에도 1830년대까지 지역 행정청이 통행료를 부과하며 유지했다. 볼터 형제가 수도원을 재건한 뒤에는 이 다리가 순례자들이 수도원으로 들어서는 상징적 입구가 되었다.

학문·예술·영성이 교차하던 수도 공동체

1868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원 설립을 인준받지만, 초창기 공동체는 두 형제와 서원 지망자 3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과 학문적 열정이 알려지면서 독일 각지에서 젊은이들이 입회하며 1873년에는 수도자가 35명으로 불어납니다. 그중에는 전례학자·화가·음악가·조각가 등 다양한 배경의 수도자가 있었죠.

수도원은 곧 신학과 예술의 허브 역할을 합니다. 당시 독일 가톨릭 신학자와 예술가들은 세속화로 단절됐던 교회 예술의 부활을 꿈꾸며 문화 운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마우루스 아빠스는 신학·음악·미술계의 젊은 지성인들을 수도원에 초대했고, 1870년대에는 전례학자 안셀름 쇼트, 화가 데시데리우스 렌츠와 가브리엘 뷔르거, 음악가 요제프 크놉 등이 입회합니다. 특히 렌츠와 뷔르거 수사가 세운 보이론 미술학교는 문화운동의 실제 거점이 되어 독일어권의 여러 성당뿐 아니라 이탈리아 몬테카시노에도 큰 발자취를 남깁니다. 
보이론의 목조 성모자상. 감정이 절제된 얼굴과 금빛·청색의 옷자락은 감정 표현보다 질서와 상징을 중시한 보이론 양식의 전형이다.
 
은총 소성당. 보이론 미술의 정신이 가장 순수하게 담긴 공간이다. 금빛과 청색이 교차하는 기하학 문양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상징하며, 중앙의 삼위일체 원과 천사·상징 문자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단순한 선과 상징적 비례가 신비의 깊이를 드러낸다.

보이론 미술이 탄생시킨 전례 공간

수도원 성당은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합니다. 주 제대와 본랑은 빛으로 가득한 바로크 양식의 전례 공간이지만, 은총 소성당과 지하 소성당에서는 마치 고대 이집트 신전이나 동방 정교회의 성소에 들어선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특히 은총 소성당의 둥근 돔 천장에는 금빛과 청색이 교차하는 기하학 문양의 천장화가 펼쳐져 있고, 그 중앙에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삼위일체의 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제단의 목조 성모자상은 아기 예수를 조용히 감싸 안고 정면을 응시하는데, 표정과 몸짓에서 감정을 철저히 절제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렌츠와 뷔르거는 감상적 사실주의로 흐르던 교회 미술 대신 고대 이집트·그리스·비잔틴 미술의 비례와 상징 질서를 되살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성당의 벽화와 모자이크·스테인드글라스를 그 기준에 따라 설계했지요. 색을 제한적으로 사용한 이유도 감정 표현보다 질서와 침묵의 균형을 드러내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당의 장식이 기도의 배경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도 속의 질서’와 ‘참여의 조화’를 중시한 이 정신은 미술을 넘어 전례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실이 바로 1884년 안셀름 쇼트 신부의 「미사경본」입니다. 쇼트 신부는 라틴어 미사에 익숙하지 않은 평신도들을 위해 미사의 각 부분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신자들이 미사 경문을 그냥 듣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를 이해하며 기도하도록 한 것이죠. 이런 정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까지 이어졌으며, 「쇼트 미사경본」은 지금도 독일어권에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수도원 낮기도. 제대를 중심으로 빛의 공간을 구현했다. 제단화에 보이론 화풍으로 ‘성모 대관’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모든 형태와 위치는 데시데리우스 렌츠가 고대 비잔틴 성화에서 분석한 ‘성스러운 비례’에 맞춰 기획한 것이다.

하늘의 전례에 참여하는 순례

보이론 수도자들은 미사를 봉헌할 때, 자신들이 모자이크의 인물들과 함께 하늘의 전례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보이론 수도자의 하루는 성당에서 시작해 성당에서 끝납니다. 매일 ‘시간 기도’를 봉헌하며, 건축의 질서 속에서 하느님의 질서를 보고 느낍니다.

그 시절 보이론 수도원에는 훗날 상트 오틸리엔 선교 베네딕도회를 창립한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도 있었습니다. 암라인 신부는 이곳 전례에 참여하고 미술 작업을 함께하면서 기도와 예술의 일치를 체험했습니다. 그 경험은 수도생활·예술·선교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새로운 수도회의 구상으로 이어졌지요.

독일 남부를 여행할 일이 있다면, 음악과 미술, 기도가 하나로 어우러진 전례를 경험하시길 권합니다. 금빛 모자이크의 질서와 침묵 속에 그 시절 수도자들의 기도와 손길이 지금도 살아 있으니까요.
 
<순례 팁>

※ 슈투트가르트에서 150㎞로 약 2시간 소요. 독일철도 열차가 수도원역(Beuron)에 정차하며, 성수기에는 특별열차(Nature Park Express)도 정차.

※ 수도원 전례 : 주일 및 대축일 미사 8:45·10:45, 평일 미사 11:00 / 아침기도 5:00, 낮기도(평일) 12:15, 저녁기도 18:00, 끝기도 20:00. 수도원 손님 숙소가 있다.(사전 예약) 성물방에 수도원 공예품·화장품(연고) 등을 구할 수 있다.

※ 유럽의 다른 순례지에 관한 알찬 정보는 「독일 간 김에 순례– 뮌헨과 남부 독일」(분도출판사 2025)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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