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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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속에서도 품위와 신앙으로 희망을 일군 사람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52. 가난한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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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머리에 짐을 인 여인들’, 유리건판, 1911,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가난하지만 서로 돕고 존중하는 문화 민족

가난한 사람을 우선으로 배려하고 돕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증거다. 이웃,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8-29) 이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믿음의 완성이다.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가난한 이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은 배척하신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42)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해 준 것으로써 선택된 사람들을 알아보실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마태 11,5)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표징이 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43)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인들이 비록 나라를 잃고 자원을 수탈당하고 풍속과 문화, 말과 글을 빼앗기고 살아도 예절을 알고 타인을 존중하며 품위를 지키고 서로 돕는 선하고 아름다운 민족이라고 칭송했다.

“이미 과거사지만 서울 보신각 종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백성들의 정서를 잘 보여주는 옛 서울의 흐뭇한 관습이다.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남자들은 절대 바깥출입을 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서둘러 귀가하여 거리를 비워주면 아녀자들은 방해받지 않고 편안히 외출할 수 있었다. 일본의 침입으로 이 오랜 관습은 사라졌다. 그러나 아녀자들을 배려하는 지엄한 예절은 경박한 일본 예절의 영향을 무릅쓰고 아직 보존되고 있다. 한국인은 자신의 나라를 존중한다. 길에서는 부인이나 과년한 처녀에게 절대 말을 걸지 않는다. 길을 묻는 일도 없다. 누군가 말을 걸면, 이 땅의 법도를 모르느냐고 반문할 것이 뻔하다.

(?) 전반적인 여성 비하와는 대조적으로 여성들은 공공 생활에서 크게 존중되는데, 이미 언급했듯이 길에서 부녀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 예절 말고도 섬세한 배려는 더 있다. 한국인들은 길에서 부녀자와 마주치면 스스로 비켜서서 그들에게 더 좋은 길을 터 준다. 신분의 차이는 말투에서도 엄격히 드러나는데, 최하층 신분인 뱃사람·옥리·백정·무속인에게 쓰는 말투를 부녀자에게는 쓰지 않는다. 최하층 신분의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부녀자에게는 오히려 경칭을 쓴다. (?) 이렇듯, 여성에 대한 공경과 존중을 보여주는 많은 특징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상을 불식시킨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65~67쪽) <사진 1>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시골 마을 풍경’, 유리건판, 1911,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의 고아 구제 활동’, 유리건판, 1925,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촌부들의 얼굴이 어쩌면 이리도 평화로울까

베버 총아빠스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의 한국 마을 풍경을 이 땅의 주인 행세를 하는 일본인들의 얄팍한 시선과 달리 숲의 고요에 은둔하며 산비탈 작은 땅뙈기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며 푸르고 향기로운 숲 아래 아늑한 바위 사이로 냇물이 재잘거리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곳에 마련된 보금자리라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깊은 산 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숨어 살면서 가톨릭 신앙을 지켜온 교우촌 신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을 표했다.<사진 2>

“한국인들은 잃어버린 땅을 포기했다. 그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살 수도 없고 함께 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 그들은 변화된 환경과 새로운 경제 사정과 낯선 풍습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그들의 손발을 묶어 놓았던 가난은 지금도 여전하다. (?) 작은 골짜기들은 오르막에서 산으로 덮였다. 그곳에 신자들의 초가집 지붕이 햇빛에 반짝인다. (?) 산길로 접어들려면 좁은 비탈길에서 협곡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작은 논두렁의 물줄기를 따라 골짜기로 발길을 재촉했다. 모난 바위 절벽 아래의 마지막 출구를 힘겹게 빠져나온 작은 시내는 트인 골짜기를 만나더니 그 흐름이 편안했다. 산곡을 벗어나 넓고 환한 평지로 가려면 징검다리를 찾아서 냇물을 건너야 한다.

(?) 신자 가정이 하나 있다. 남편은 12년 전 천주교에 귀의했는데 이는 말 그대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매일 술에 절어 살다가 영세 후 술을 끊었다. 우리를 보면 반가워할 것 같아서 그 집에 잠깐 들렀다. 연명하기에도 곤고한 이 촌부들의 얼굴이 어쩌면 이리도 평화로울까! 아내가 말했다. ‘하늘나라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우리 집에 깃든 평화를 통해 나는 땅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알고 있답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76, 209~210쪽)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단지 물질적 가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거나 종교적인 다양한 형태의 가난에도 미친다. 베버 총아빠스는 나라를 잃은 한국인들이 가난 때문에 좌절하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육과 구제 활동을 통해 한국인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사진 3>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세검정 앞에 서 있는 어린 소녀’, 유리건판, 1911,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가난 벗어나기 위해선 실업학교 교육 바람직

“이 불쌍한 고아들에겐 어머니가 없다. 그들 대부분은 표정이 솔직했다. 감히 말하건대, 묘한 슬픔이 묻어나는 그 진지함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어린 가슴에서 샘솟는 아이들 특유의 쾌활함은 깃들 여지가 없는 듯했다. (?) 그리스도교의 숭고함만이 그 어두운 그늘에 빛을 던져줄 것이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고,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가르침이다. 진실로 한국 교회에서 가난이 떠난 적이 없었다. 교회와 선교사들이 좀더 풍요로웠더라면, 빈민들의 현실적 궁핍을 돌볼 수단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29~134쪽)

희망은 사랑의 행복으로 이끈다. 희망의 약동은 좌절을 극복하고 생명을 불어넣어 삶을 증진한다.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인을 ‘문화 민족’이라고 했다. 이 문화 민족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선 실업학교 교육이 바람직하고 필수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 파견된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운영한 실업학교와 툿찡 베네딕도회 수녀들과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이 운영한 학교들이 새로운 사회 움직임을 주도했고, 산업 활동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서울 세검정 계곡에서 한 어린 소녀를 사진에 담았다. 세검정을 배경으로 남루한 차림의 가난한 소녀를 촬영하면서 그는 암울한 현실과 함께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선교 사명을 재인식했다.<사진 4>

“그래도 지속적인 국민 교육이 필요하다. 한국 땅 가는 곳마다 일본인들이 장악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판국에서 선교회가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가 사회 활동에서 배제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를 지향하는 백성의 원의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소학교와 사범학교가 필수 불가결하다. 자, 힘을 내서 사업에 매진하자!”(「고요한 아침의 나라」 184쪽)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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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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