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성당 다니다 영세
의대 재학 중 ‘부르심’ 느꼈지만
부모님 뜻에 따라 의대 졸업
미국 유학 갔다가 귀국
선우경식은 강론 때 자주 들었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성경 구절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의사였다.
그는 1945년 평양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6·25전쟁 때 부모님을 따라 대구로 피란 왔다가 서울에 정착했다. 중학생 때 집에서 혼자 성당을 다니다 세례를 받았고, 그때부터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의대 재학 중 ‘부르심’을 느끼고, 휴학한 후 가톨릭 신학대학에 가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신학교를 가더라도 대학을 마치고 가라”며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는 아버지 뜻에 따라 1969년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했지만, 사제의 꿈은 접었다. 외아들이자 장남으로서 ‘의사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사제가 아니어도 의사로서 사회에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성모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해군 의무단 장교로 병역의무를 마친 후 성모병원 내과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했다. 그 과정에서 가난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환자들을 보며, 의대를 졸업할 때 손을 들고 맹세한 “모든 환자는 최선의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의사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그를 힘들게 했다.
선우경식은 깊은 갈등 끝에 저소득층에 대한 정부 의료보험이 잘 갖춰진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 브루클린(Brooklyn)에 있는 ‘킹스 브룩 유다인 메디컬 센터(Kings brook Jewish Medical Center)’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3년 과정을 마치자, 병원에서는 그에게 일반 내과 의사로 근무해달라고 제의했다. 의사 생활에 갈등과 회의가 없던 그는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성취감도 만족도 잠시였다. 이번에는 새로운 갈등에 빠져들었다. 그는 액수가 큰 월급 수표를 받을 때마다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된 자신이 의사라는 직업으로 돈만 벌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통장에 잔고가 쌓일수록 돈 잘 버는 미국 의사가 되었다는 현실이 불편했다. 2년을 고민하던 선우경식은 이대로 미국에 있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돈 잘 버는 의사로 안주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귀국을 결심했다. 1980년 9월,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
가톨릭대 의대 졸업식에서 부모님과 함께
조그만 의원이라도
의술로 돈을 벌지 않기로 마음 먹고
저소득층 위한 1차 의원 만들기로
김 추기경의 조언
병원 설립 취지 등 설명하자
추기경, 교회 울타리로 들어와
교계 병원 등 지원 받으라 이야기
하느님 뜻 따르는 의사
한국으로 돌아온 선우경식은 취직할 생각보다는 어떻게 의사 생활을 해야 갈등을 느끼지 않고 보람이 있을지에 대해 골몰했다. 그는 종일 자신의 방에서 책장 정리를 하거나 뒷마당에 나가 장독대의 옹기 자리를 이리저리 옮기며 자신의 길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선우경식은 성소는 포기했지만, 하느님 뜻을 따르는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신림10동에 있는 사랑의 집 주말 봉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론에서 신부님이 언급한 마태오 복음 16장 24절의 말씀이 가슴 속으로 쿵 떨어졌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 순간 선우경식은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한 큰 충격을 느꼈다. 이제까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한 봉사만 생각했지, 자신을 버린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의사인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의 기도는 길었고, 어느 날 자신이 버려야 할 것은 의사라는 직업으로 벌 수 있는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술로 돈을 벌지 않고, 온전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의료봉사자가 되는 것이 자신을 버리는 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선우경식 원장, 산부인과 이진우 선생
요셉의원의 신림동 시절, 진료하고 있는 선우경식 원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
그즈음, 사랑의 집은 환자들로 넘쳐났고,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6개 지역 활동가들이 매달 조합비를 내는 사람들로 조합을 구성해서 조그만 의원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갖고 왔다. 이 제안은 선우경식이 생각하는 자선병원은 아니었지만, 자선병원을 고집하면 시작조차 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부분은 훗날 고민하기로 하고 그들과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1차 진료 병원인 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구입해야 할 의료 기기도 많고, 여러 분야의 의사도 있어야 했다. 천만 단위를 넘어 억 단위가 필요했지만, 조합원이 될 주민들이나 활동가들이 뭉칫돈을 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선우경식은 암담했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의 꿈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선우경식은 먼저 사랑의 집을 담당하는 노엘 매키 신부와 크리스토퍼 신부를 만났다. 그가 1차 진료 병원을 만들기 위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모금을 하려고 한다고 말하자 매키 신부가 조언을 해줬다.
“선우 선생님,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쪽에 연락해보세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셔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다
얼마 후 선우경식은 어렵게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다. 그가 조합을 만들어 병원을 만들려고 한다는 설명을 들은 추기경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셉 형제님, 교회가 서둘러서 그런 곳에 가서 의료복지 사업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못 하는 현실에서 평신도가 추진한다고 하니 고맙지만, 그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을 경청하던 선우경식은 공손한 어투로 대답했다.
“예, 추기경님.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난감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는 너무나 많은 분이 진료와 치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세상을 떠나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병원 설립에 동참하게 되었고, 추기경님의 조언을 듣기 위해 찾아뵌 겁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선우경식을 바라봤다. 힘든 일에 뛰어든다는 것에 걱정이 앞섰지만, 모르는 체할 수도 없었다.
“요셉 형제님, 제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추기경님, 혹시 성모병원 같은 가톨릭 병원에서 좀 오래된 의료기기를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선우경식은 의료 장비라도 확보하면 작고 허름한 단독 건물을 얻어 개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들은 추기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요셉 형제님. 제 생각에는 그런 도움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교회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걸 생각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제 생각에는 지금 말씀하시는 병원이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의 부설기관으로 들어오면, 서울의 성모병원을 비롯해 대구의 파티마병원 같은 교계 병원의 지원을 받을 명분도 생기고, 향후 모금 활동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우경식은 김수환 추기경의 조언을 들으며 돈보다 힘이 센 동아줄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