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탕녀 바빌론으로 장면이 옮겨간다. 그녀는 ‘큰 물’ 곁에 앉아 있다. 요한 묵시록이 소개하는 ‘큰 물’은 이미 구약에서 하느님 백성과 대척점에 있던 여러 제국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데 있어 익숙하게 사용되던 이미지다.(이사 8,7; 예레 46,7-8; 47,2 참조) 요한 묵시록은 이 이미지를 “백성들과 군중들과 민족들과 언어들”(17,15)이라는 네 가지 범주로 해석한다.
요한 묵시록이 세상의 보편성을 규정할 때 반복하던 방식이 이번에도 이어진다.(묵시 5,9; 7,9 등 참조) 말하자면, 대탕녀 바빌론의 공간은 특정 제국 또는 지역에 갇힌 역사적 세력이 아니라 인류 전체와 뒤엉켜 있는 어떤 거대한 영향력으로 소개된다.
‘물’의 이미지를 고대 바빌론의 유프라테스강과 연결하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의 시대는 로마 제국의 시대였다. 요한 묵시록은 오래된 바빌론을 불러내어 로마 제국을 비판적으로 가리키는 은유적 장치로 사용한다. 옛 제국의 이름이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제국의 상징이 되는 순간, 우리는 한 단어가 시대를 건너며 얼마나 완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지 깨닫게 된다. 바빌론은 ‘지명’이 아니라,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거대 권력의 이름이 되고 그 거대 권력이 자리 잡은 곳에 세상의 모든 이는 마치 신을 경배하듯 모여들게 마련이다.(묵시 13,4 참조)
문제는 16절에서 발생한다. 대탕녀 바빌론이 오히려 열 뿔과 짐승에게 공격당한다. 앞서 그녀와 가까이 붙어 있던 세력들이 돌연히 등을 돌리는 장면이다. 역사적 해석은 이것을 로마를 위협하던 주변 민족들의 저항으로 읽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것은 특정 전투의 기록이 아니라, 악의 내부에서 시작되는 자멸의 논리이다. 로마 제국은 요한 묵시록의 시대에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린 파멸은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세상의 화려한 권력이 곧 허무의 다른 이름’이라는 묵시적이고 영성적인 통찰에 가깝다.
바빌론의 파멸을 묘사하는 언어는 에제키엘서 23장 25절부터 29절까지의 예언을 그대로 끌어온다. ‘탕녀’처럼 타락한 예루살렘이 벌거벗겨지고 짓밟힐 것이라는 예언이, 여기에서는 바빌론에게 적용된다. 이것은 요한 묵시록이 바빌론을 단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제국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종교적 타락의 형상’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살을 먹는다’(묵시 17,16 참조)는 표현 또한 예언서의 심판 언어를 반복하는 것이다.(예레 34,22; 호세 2,5 참조) 우리가 이미 읽었던 요한 묵시록 2장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알려준다. 우상 숭배적 경제 구조와 타협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조차 ‘탕녀’ 이미지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경고 말이다.(묵시 2,14.20?22 참조) 요한 묵시록에게 탕녀의 이미지는 성적 비유를 넘어, 내적 신앙을 포기하고 다른 힘에 기대어 안정과 번영을 얻으려는 모든 움직임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요한 묵시록의 견해는 불편할 정도로 정직하다.
더 어려운 질문은 17절에서 나온다. 악의 무리처럼 보였던 열 뿔과 짐승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 마음을 ‘넣어주신다’는 것. 이 역설적 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를 설명하는 데 마르코복음 3장 26절 말씀이 도움이 된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요한은 이 역설의 원리를 묵시적 장치 안에 담아낸다. 악은 외부의 심판보다 내부의 분열을 통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는 통찰이다. 다니엘서도 마지막 시대의 악한 세력을 ‘나뉘어진 나라’로 묘사하고(2,41?43 참조), 구약 여러 본문에서 하느님은 악한 민족들이 서로 공격하게 하여 스스로 쇠퇴하도록 하신다.(에제 38,21; 하까 2,22 참조)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이 말하려는 핵심은 단순하다. 하느님은 악의 결탁을 외부에서 억지로 깨뜨리지 않으신다. 악은 자신이 만든 구조 속에서 서서히 붕괴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에 관해 다시 질문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들만을 통해 일하시지 않는다. 때로는 당신을 거역하는 이들의 완고함조차, 당신의 더 큰 구원을 드러내는 계기로 사용하신다.
경쟁과 서열에 의해 존재하며 하느님 거역하는 완고한 세상
스스로 파멸 향하는 모습에서 하느님 섭리 읽을 수 있어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 사건은 그 대표적 사례다.(탈출 4,21; 7,3 참조) 하느님의 섭리는 언제나 조용하며, 인간의 선택과 그 결과들 사이에서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드러낸다. 그것을 눈치채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과 악의 식별이 아니라 선과 악을 규정하는 관념과 그 관성에 대한 성찰이다.
18절에서 대탕녀 바빌론은 ‘왕권을 가진 큰 도성’으로 규정된다. 로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이 옛 바빌론을 빌려 로마를 지칭했듯, 우리가 오늘 이 본문을 읽을 때도 로마 제국 자체를 넘어 오늘의 세계가 만들어낸 또 다른 바빌론의 형태를 질문해야 한다. 자본과 기술이 만들어낸 경쟁의 구조, 국경을 넘어선 힘의 집중, 그 속에서 조용히 지워지는 이들의 고통. 요한 묵시록은 이러한 모든 현실을 향해 ‘그 구조의 총체’가 정말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가?”라고 묻는다.
큰 물로 상징된 모든 민족이 하나의 힘 앞에 종속되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 아니면 각 민족이 저마다의 고유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지가 오늘의 우리가 읽어야 할 요한 묵시록의 주제다. 세상은 경쟁과 서열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그런 질서 안에서 누군가의 성공은 다른 누군가의 실패를 전제로 한다.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묻는다. 과연 이런 방식의 승리와 패배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인간 사회의 모습일까. 누군가의 화려한 성공 앞에 모여든 오늘의 ‘열 뿔’들이 행여 그 내부의 갈등과 다툼으로 파멸과 죽음의 길을 기어이 걸어가고야 마는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아닐까. 바로 이러한 질문이, 오늘 우리 시대가 새롭게 마주한 바빌론을 들추어낸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