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조언 따라 교회 울타리로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기관 편입
운영·재정 독립… 조합원 대부분 찬성
1년 만에 병원 건립 자금 1억여 원 모금
상근 원장 추대… 1987년 8월 개원 미사
교통비 정도 월급 받기로 하고 수락
친구·선후배에게 진료 봉사 부탁
병원 찾아다니며 의료 장비 기증 요청
김수환 추기경 “교회가 할 일 대신해줘 감사”
선우경식은 십시일반으로 설립하려는 조그만 병원에 대해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의 부설기관으로 들어오는 걸 생각해보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조언에 귀가 번쩍 뜨였다. 교회 울타리 안에 있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기관이 되면 교계 지원을 받는 일이 수월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조합원을 모아 설립하는 병원이기에 운영과 감독 부분은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했다.
“추기경님, 부설기관이 되면 병원 운영이 담당 신부님의 지휘, 감독을 받는 겁니까?”
“요셉 형제님, 교계 질서 속으로 들어오니까 담당 신부는 정해지겠고,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대표자가 서울대교구장인 저이기 때문에 병원 대표자도 제 이름이 될 겁니다. 그러나 운영과 재정은 독립적입니다. 이익이 나도 병원에 귀속되고, 적자가 나도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보태주는 것도 없으면서 왜 부설기관으로 들어가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건 서울가톨릭복지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지회에 수익이 들어오는 게 아니지만, 만약 빚이 많아지면 가톨릭의 명예를 위해 갚아줘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서 부설기관 허가를 쉽게 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지회 부설기관이 되면 병원 설립과 운영 면에서 장점이 있고, 교회와 복지회에서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카리타스 정신에 부합하는 활동을 지원하는 게 되기 때문에 서로 좋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병원이 조합병원이라고 하니, 조합원들이 서울가톨릭복지회 부설기관으로 들어오는 걸 찬성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추기경님, 바쁘실 텐데 긴 시간 동안 좋은 조언과 방안을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돌아가서 사람들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본 후 연락 올리겠습니다.”
“요셉 형제님.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가난한 이웃과 환자들을 위해 교회가 못하고 있는 일을 대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예, 추기경님. 고맙습니다.”
선우경식은 공손하게 인사한 후 추기경 집무실을 나왔고, 김수환 추기경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개원 미사 당일 요셉의원 입구계단.
1987년 8월 29일 신림사거리 관악종합시장 옥상에서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를 담당하는 강우일 주교가 요셉의원 개원 미사를 주례하고 있다.
선우 원장이 요셉의원 개원 미사를 마치고 의원 설립 추진 과정에 대해 경과보고하고 있다.
1987년 진료시작 당시 요셉의원 주변전경.
상근 원장으로 추대
병원 설립 참여 의사를 밝힌 성남 만남의 집과 성남 메리놀공동체, 서울대교구 구로3동본당은 가톨릭공동체였다. 조합원 중 난곡 지역 참여자들 대부분은 서울대 의대 가톨릭학생회의 주말 무료 진료 혜택을 받았고, 신림10동 주민들 역시 가톨릭 공동체인 사랑의 집에서 가톨릭대 의대 가톨릭학생회의 무료 진료 혜택을 받은 이들이 많아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때부터 준비위원회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와 함께 병원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며 실행에 옮겼다. 준비위원회는 병원 건립에 필요한 자금이 최소한 1억 2000만 원 정도라고 계산하고 본격적인 모금에 나섰다. 1986년 봄이었다.
1987년 봄, 1년 동안 준비위원들뿐 아니라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도 나선 덕분에 1억 866만 원이 모였다. 준비위원회는 병원이 들어설 장소를 찾기 위해 신림동 지역 곳곳을 발품 팔고 다녔고, 얼마 후 적당한 장소를 찾아냈다. 신림1동의 시장(관악종합시장) 슈퍼마켓 건물 2층의 396.6㎡(120평) 공간이었다. 비록 낡고 허름하지만, 금액도 위치도 적당해 6000만 원을 주고 임대계약을 마쳤다.
준비위원회는 병원을 운영할 책임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 논의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선우 선생님, 월급을 교통비 정도만 받고 상근 원장 할 수 있으세요?”
의료진 대부분이 자신의 직장에서 근무를 마치고 일주일에 한두 번 오는 봉사자들이었기에 오전부터 상근할 의사가 필요해서였다.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내가 할게요.”
선우경식은 봉사자로서의 의사가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가 흔쾌히 결정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아버님이 사업을 해서 부모님을 부양하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나이가 42살이 되도록 독신이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주변 지인들을 통해 선 자리를 만들었다. 미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온 의사. 아버지가 하는 사업도 잘되고 있어 장남으로서 무게도 가벼웠기에 선 자리는 줄을 이었다. 그러나 선우경식은 선 자리에 나가면 자신은 돈 버는 의사는 되기 싫고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겠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를 이해해주는 인연을 만나는 건 쉽지 않았고, 어머니는 아들의 나이가 40이 넘어가자 더는 선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
그가 상근 원장을 맡겠다고 대답하자 모두 손뼉을 치며 그의 결심에 감사를 표했다. 얼마 후 준비위원회가 열렸다. 원장이 정해졌으니 병원 이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에서 활동하며 ‘교회빈민의료협의회’ 총무로 활동하는 백월현 위원이 제안했다.
“병원으로 이해하기 쉽게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성가정의 수호자이며 임종하는 이와 노동자들의 수호자이신 요셉 성인의 이름을 붙여 요셉의원으로 하면 어떨까요?”
그때 선우경식이 손사래를 쳤다. “제 세례명이 요셉이라 그렇게 지으면 이 병원이 제 병원인 것처럼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 다른 이름을 찾아보지요.”
“아니, 선생님 세례명이 요셉인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지나친 걱정이십니다. 하하.”
조합원들 병원 둘러보며 감격의 눈물
선우경식은 이때부터 사랑의 집에서 주말 진료 봉사를 하던 의료진뿐 아니라 친구와 선후배 의사들에게 요셉의원 진료 봉사를 부탁했다. 중고 의료 장비와 기구를 기증받기 위해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를 통해 강남 및 여의도 성모병원, 강릉 갈바리의원, 대구파티마병원 등 교계 병원에 협조를 요청하고 자신의 대학 동창과 선후배가 운영하는 병원을 찾아다녔다.
1987년 8월 29일 토요일 오후. 신림사거리에 있는 관악종합시장 옥상에서는 요셉의원 개원 미사가 봉헌되었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를 담당하는 강우일 주교는 강론을 통해 요셉의원 개원 축하와 함께 그동안의 수고에 감사하다며 앞날을 기대했다. 개원 미사가 끝나자 선우경식이 그동안의 추진 과정에 대한 경과보고를 했다. 1983년 가을부터 사랑의 집 주말 봉사를 시작한 후 4년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앞으로도 헤쳐가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체계적인 진료의 사각지대에 있던 가난한 환자들이 마음 놓고 올 수 있는 병원이 만들어진 사실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참석자들은 이제는 경제적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이 생겼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박수로 화답했다. 강우일 주교는 병원 축복을 하기 위해 2층에 있는 요셉의원으로 들어갔고, 축복이 끝나자 병원 내부를 둘러보던 조합원들은 검사실·수술실·입원실·약제실·진료실·엑스레이실 등을 둘러보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