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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장 2026년 사목교서] ‘가정의 해’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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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장 조규만(바실리오) 주교는 ‘가정의 해’를 주제로 2026년 사목교서를 발표하고 작은 교회인 가정의 가치를 강조했다.

 

 

조규만 주교는 사목교서 서두에서 2026년을 가정의 해로 선포한다고 밝힌 뒤 “혼인으로 비롯되는 가정은 작은 교회이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공동체”라고 말했다. 이어 “행복한 본당 공동체의 기준은 본당에 소속된 행복한 가정이고 그런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에 달려 있다”며 “그리스도교 가정은 세상의 평화, 인류의 행복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한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사랑으로 대화하고 문제를 함께 풀어갈 때, 또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할 때 일치가 된다”면서 “예수님 역시 행복한 가정의 요소로서 효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고 설명했다.

 

 

조 주교는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 세 요소가 하나의 일치를 이루는 모델은 나아가 가정과 본당과 사회 세 요소가 일치를 이루는 중요한 모델이 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인간이 하나가 되기 위해 사랑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닮아야 할 목표로서의 삼위일체 하느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라며 “신앙의 가정은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사목교서 전문.

 

 


2026년 사목교서: ‘가정의 해’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이 있어라.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구나.”(시편 128,1-6)


+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교우, 수도자, 사제 여러분!

저는 올해를 ‘가정의 해’로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첫 기적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하셨습니다.(요한 2,11 참조) 혼인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혼인으로 비롯되는 가정은 작은 교회이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가 모든 것을 이루는 그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행복한 본당 공동체의 기준은 본당에 소속된 행복한 가정들입니다. 그런 가정이 얼마나 많으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정의 기둥은 부부입니다. 부부 사랑은 가정에 행복을 피어나게 합니다. 행복한 가정이 걸어가면 세상의 평화가 뒤를 따릅니다. 그리스도교 가정은 세상의 평화, 인류의 행복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가정의 행복을 위한 프로그램이 부족합니다. 결혼하는 남녀들 대부분이 ‘결혼’ 준비는 하지 않고, ‘결혼식’ 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식장, 음식업체 선정, 초대 손님들의 규모, 사진 촬영, 혼수 등에 관심을 보입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행복한 결혼과 가정을 위하여 혼인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합법적이고 정당한 결혼을 안내하며, 결혼의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남자는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따라서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으로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마태 19,4-6 참조) 결혼을 준비하는 남녀를 대상으로 ‘선택’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결혼한 사람들의 지속적인 사랑과 행복한 가정을 위한 M.E(메리지 엔카운터)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M.E의 대.성.기.공(대화, 부부행위. 기도. 공동체)은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입기 쉬운 부부들이 더욱더 사랑하며 살아 가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행복한 가정의 중요한 요소로서 아버지의 역할을 잘하기 위한 ‘아버지 학교’와 어머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어머니 학교’라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작은 몸짓이지만 이러한 모임들은 행복한 가정을 위해 소중한 것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많은 사회 문제들이 가정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회적 범죄가 가정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날마다 매스컴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미 성경이 그러한 상황을 알려줍니다. 아담과 하와의 갈등(창세 3,11-13참조)은 카인과 아벨의 형제 싸움으로 이어지고(창세 4,8 이하 참조), 이러한 가정의 분열은 노아의 홍수(창세 6,13 이하 참조), 그리고 마침내 바벨탑 사건(창세 11,1-9 참조)이라는 사회적 갈등에 이르게 됩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사랑으로 대화하고 문제를 함께 풀어갈 때, 또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할 때 일치가 됩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이 훌륭한 모범이 됩니다.

나자렛의 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지혜와 용기에 있어서도 탁월하였습니다. 함께 한 아들의 십자가의 길에서 어머니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과 용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을 찾았던 먼 길의 여행에서도 태교와 출산을 준비하기 위한 치밀함과 지혜와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루카 1,39-56 참조) 12살 소년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파스카 축제를 위해 다녀오는 길에 잃어버렸을 때, 사흘 동안 나자렛과 예루살렘 사이의 그 길을 오가며 찾아 헤맸던 마리아의 모습에서도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루카 2,41-50 참조) 무엇보다 마리아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믿음을 지니셨고(루카 1,36-38), 하느님이 베푸신 자비를 기억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그리워하였습니다.(루카 1,46-56 참조)

성 요셉은 마리아에게는 훌륭한 남편이었습니다. 침묵의 성인이십니다. 자신과 무관한 약혼자의 임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남몰래 파혼하였습니다.(마태 1,19 참조) 천사의 메시지를 신뢰하며, 헤로데로부터 위험을 겪게 되는 마리아와 그의 아이를 위해 기꺼이 보호자로 나섰으며(마태 2,13-14) 가난한 목수 일로 그들을 부양했습니다. 진정으로 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성 요셉은 예수님에게 비록 양부였지만, 훌륭한 아버지였습니다. 훗날 예수님은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소개하셨습니다.(마태 6,9) 성 요셉이 예수님에게 좋은 아버지였다는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 역시 행복한 가정의 요소로서 효도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예사롭게 지나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였습니다. ‘코르반’(마르 7,11 참조)으로 부모에게 드려야 할 공양을 회피하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질책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요한 19,27 참조)

이러한 가정의 일치와 서로의 사랑은 본당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데 중요한 밑바탕이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 세 요소가 하나의 일치를 이루는 모델은 나아가 가정과 본당과 사회 세 요소가 일치를 이루는 중요한 모델이 됩니다. 가정이나, 본당이나 사회 공동체가 일치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모델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남북이 하나가 되고자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 공동체, 본당 공동체가 하나되고 일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가정이 일치하기를 바라고, 우리 부부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염원하는 것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가 되고 일치할 수 있는지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하느님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알아내려는 철학적, 이성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분을 대화 상대자로 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역사적 체험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교리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요한 10,30)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예수님의 사랑에서 비롯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나무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 못이 필요합니다. 종이는 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목표로서의 삼위일체 하느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수학으로, 과학으로, 인간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 안에서만 헤아릴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어내신 뜻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으로만 일치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무엇보다도 우리 가정 안에서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가정은 그 하느님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야 합니다.

원주교구의 모든 교우들과 수도자와 사제들에게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은총을 빕니다.


  2025년 12월 대림 제1주일에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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