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코르넬리뮌스터 수도원의 회랑에는 화가 자넷 브룩스 겔로프의 작품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Unterwegs nach Emmaus, 1992)>가 걸려있다. 수도원 측은 이 유화가 성당 입구를 향해 오른쪽으로 꺾이는 장소에 설치되길 원했다. 이는 성당으로 가는 이들이 걸음을 잠시 멈추고 침묵 속에서 예수님과 머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얼마 전, 급격한 기후변화로 북극곰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북극 해빙(解氷) 위에서 바다표범이나 물범을 사냥하는 생태계의 최상위자 북극곰이 사라진다는 건, 극지방 기후 조절 장치가 고장 났다는 신호라고 한다. 나는 잠시 빙하가 녹아버리는 온난화로 멸종 위기에 놓인 북극곰과, 세상 가치의 열기로 서서히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는 수도자들이 왠지 닮아 보인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중에 대도시를 지날 때면 사람들이 순례자들에게 야유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효율을 앞세운 현대 사회 속에서 수도자라는 존재가 존립조차 힘들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인공지능에 인생의 고민을 털어놓는 시대에 수도자의 자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지 나는 궁금했다. 하여 수도자가 되고 싶어 하는 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너는 수도자가 되고 싶은 2025년을 사는 소녀야, 입회 전에 수도 생활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니?”
수도원 성소자로 설정된 인공지능은, 15가지 정도의 질문을 삽시간에 제시했다. 대강의 내용은 이랬다. ‘아직 하느님의 부르심과 감정 사이에 내 소명을 확신하기 어렵다’는 질문부터, ‘혼자 있는 게 두려운데 수도생활의 고독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다’고 했고 또 조금 가벼운 질문으로는, 수도회 일과 중의 자유시간과, 휴식 보장 그리고 가난을 서원하지만 경제적 지원이 있는지까지 물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오늘날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은 과연 행복한가’라는 진중한 질문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리아의 종 수녀회에 계신 권옥주 안나 수녀님을 만나 인공지능 소녀의 질문을 털어놓았다.
“수녀님, 인공지능이 묻는 것 중에는 ‘수도 생활 안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있습니다. 아마도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잃을까 봐 두려운 거겠지요. 만약 입회자의 실제 질문이라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안나 수녀님은 ‘수덕신앙 안에서 종말론적인 세상을 미리 보여주는 사람들이 수도자’라고, 작은 물결처럼 조용히 입을 떼셨다.
“수도 생활은 추측이 아니라 경험을 해봐야 알 수 있는 삶입니다. 수도 여정은 한평생 가는 거니까요. 처음에는 의협심으로 버틸 수 있어요. 내가 해내는 거니까. 그러다 긴 시간 속 겪은 시련 중에 자기 뜻은 다 타고 다시 깨어나게 됩니다. 수도자의 완성은 40~50년 후에나 피어나는 꽃 같아요. 그렇다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는 마세요.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제자들을 봐도 그들은 각자 다른 12색이었으니까요.”
인공지능 소녀의 질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북극곰이 기후변화로 사라지는 것처럼, 하느님 매력에 빠진 이들이 점차 사라지는 위기’에 대해 묻고 싶었다. ‘수도자의 감소’에 대해서는, 이른바 이런저런 말들로 ‘수도자가 제대로 살지 못한 탓’이라든가, ‘편하게 살려는 젊은이들의 세태’를 꼬집곤 한다. 그러나 안나 수녀님은 ‘부르심의 정화기’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한 지체로서 수도자의 성소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수도회의 필요에 따라 양산되는 수도자가 아니라, 설령 단 한 명일지라도 멋지게 살면서 하느님께 충만한 이가 필요하지요. 이름 없는 자리 어딘가에서 순수하게 정화된 수도자들이 숨어 기도하기에, 시대의 성소는 줄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날 청년들은 성공을 향했던 인생 목표의 공허함과 자기실현의 불안함 사이에서 선뜻 ‘부르심의 길’을 택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수도 생활은 현실이니 자기 포기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하느님 안의 머무름’을 상상하기 힘들 겁니다.”
나는 질문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기도 생활이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시간’이 되기까지, 수녀님은 어떤 시간이 필요하셨나요?”였다.
안경 너머로 기억을 더듬으시는 듯, 수녀님은 잠시 침묵하셨다.
“고독과 외로움이 다가올 때, 기도는 자연스럽게 시작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름에는 인내가 필요해요. 사실 수도 생활의 위기가 없으면 재미가 없을 거 같아요. 그러니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는 공동 기도 전에 성체 앞에서 수도자 이전에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선 느끼려고 합니다. 특별한 기도는 없어요. 예수님에 대한 묵상은 ‘텅 빈 상태’에서 성체 앞에 앉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저는 알아요. 하느님은 제게 기도를 강요하지 않는 분입니다. 머물면 머물수록 알게 되지요.”
화가 자넷 브룩스 겔로프의 작품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는 절망적인 자세로 등을 드러낸 두 제자가, 고개를 숙인 채 불확실한 여정을 걷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때 두 사람 옆에 가는 선으로 덜 형상화된 모습인 투명하고 가벼운 인물이 다가온다. 그는 제자들과 동행하며 묻는다. 그들이 향하는 언덕을 지나 지평선 너머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다만 작가는 작품 오른편에, 어둠만이 아니라 거기에 빛을 뒤섞어 놓으면서 더는 걱정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그분과 함께 나가자며 초대하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사별한 여인들을 위한 미국 수도공동체라든가, 결혼한 부부가 일정 시기를 산 후에 각자 남자와 여자 수도회로 입회하는 유럽의 수도공동체가 한국에서도 생길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세상 모두는 다양한 상황에서 주님을 간절히 바라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묻고 싶었다. “세상에 살면서 스스로 행복한 수도자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에 안나 수녀님은 “하느님을 닮은 사랑과 보이지 않는 침묵”이라고 말씀하셨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스승 예수님이 먼저 다가와 위로하셨듯이, 흔들리는 이 시대의 위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이 때론 수도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시어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지는 않을까. 보이지 않는 온난화에 북극곰이 삶의 터전을 잃고 사라지는 것처럼, 무너져 가는 우리의 영적 가치로 인해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남지는 않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는 두 손을 모아 본다.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 (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