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이라는 대주제를 아가서를 통해 정리하며, “교리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이 교리서의 미국판 서문을 쓴 마이클 발트슈타인은 아가서의 묵상을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신학하기’로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에로스에 대한 사랑의 시는 오직 기도 안에서만 ‘우리 마음 안의 노래’로 다시 울려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아가서 구절들이 교회의 전례 안에서 울리고 있으며, 태초의 성사적 실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로스가 거룩함의 시원이요 본질적 표징임을 인식하려면 이원론적 에로스 이해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가서의 시들은 하느님과의 ‘혼인적 일치’로 부르심에 대한 경험을 표현한 언어이다. 성적인 특성과 신성함의 통합,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오, 여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여”(아가 1,8),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 … 얼마나 더 향기로운지!”(4,9-10)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5,2) “일어라, 북새바람아! …이 맛깔스러운 과일들을 따 먹을 수 있도록!”(4,16)
이러한 표현들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둘만의 관계 외에 다른 무엇이 있음을 말한다. 즉 육화된 실재, 성사적 실재의 가장 본질적 요소를 확인한다. 생명이신 하느님의 혼인적 사랑의 신비는 인간이 소유하는 ‘질료성’을 통해 상호 소통한다.
교황은 아가서 시편들을 올바르게 읽으려면 성적인 측면과 신성함을 통합해야 한다며 학자들의 견해를 제시했다. “충실하고도 행복한 인간적 사랑은 인간에게 신적 사랑의 특질들을 드러내 준다.”(뒤바를르, A.M Dubarle) “아가서의 내용이 성적인 동시에 신성하다.”(리스, D.Lys)
신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신랑의 능력이며 사랑에 대한 시험이자 척도다. 통합적 의미에서 몸에 대한 이끌림은 항상 그 대상인 사람, 그 자체이다. 이는 마음으로 보는 전망이며, 바라보는 이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고 결정한다. 아가서에서 신부를 깊게 응시하는 신랑의 태도는 신부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바라봄’이 존재의 지향성을 결정한다면, 연인은 선물의 진리에 따라 살아감을 결정한다. 신랑은 여자를 선물로 받아들이며 애틋이 존중하는 태도로, 이름이 아닌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 불러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게 불러 주길 여자가 원했던 것이다. “아,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빨던 오라버니 같다면!”(아가 8,1) 교리서는 신랑의 인식에서 누이가 신부로 가는 과정은 하나의 도전과도 같다고 한다. 자신의 연인을 누이로 부르면서 사랑의 동기를 평가하고, 누이는 두 사람의 존엄성이 같음을, 갈망하는 것이 음욕이 아닌 사랑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몸의 언어’에 속하는 누이는 혼인적 사랑의 진리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아가서의 연인은 참된 에로스가 소유와 이기적인 만족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증거한다. 상호적 황홀경 안에서, “거리에서 당신을 만날 때 누구의 경멸도 받지 않고 나 당신에게 입 맞출 수 있으련만.”(아가 8,1) 이러한 경험이 깊은 내적 평온함을 가져온다. “나는 평화를 찾은 여인처럼 그렇게 당신 눈앞에 있습니다.”(아가 8,10)
교황은 하느님 모상인 남자와 여자가 신실한 자기 증여의 선물로 받아들인 때를 ‘몸의 평화’로 묘사하고, ‘나의 누이, 나의 신부’로 부른 것이라 한다. 이 신성한 유대는 초자연적 질서 안에서 구성됐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