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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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욕망의 자리, 대바빌론(묵시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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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묵시록 18장은 에제키엘서 27~28장을 선명히 비추는 거울처럼 닮아있다. 옛 예언자는 몰락해 가는 티로를 향해 장송곡을 불렀고(에제 27장 참조), 그 도시 위에 내릴 하느님의 심판을 단호한 어조로 선포했다.(에제 28장 참조) 요한 묵시록은 그 오래된 비애와 심판의 언어를 되살려, 이번에는 대바빌론의 추락을 노래한다. 


로마 제국의 은유로 기능하는 대바빌론은 부와 힘이 응축된 무대였고 사치와 문화가 폭발하는 도시였다. 이런 대바빌론이 추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상의 해석이며 그 해석을 요한 묵시록 18장은 과거 예언자들의 애가를 통해 전하고 있다. 문명의 가장 화려한 무대가 돌연 폐허의 무대로 전환된다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신앙적이고 영성적인 해석의 다짐이다.


그 다짐은 ‘다른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다른 천사가 나타나고 그의 광채로 땅이 환해지는 장면은, 마치 구약에서 하느님 영광의 발현이 풍성히 묘사되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에제 43,2 이하 참조) 빛은 단순한 조명 이상의 의미를 띤다. 그것은 한 세계가 끝나고 다른 세계가 문을 열기 직전, 경계 위에서만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이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저만의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이,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임을 빛은 가리킨다. 천사가 힘찬 목소리를 외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천사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우렁찬 외침을 암시한다.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외침이 이 지상을 향해 울려 퍼진다. 이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결의에 찬 외침이다.


천사의 목소리는 ‘무너짐’에 대한 선포다. 대바빌론의 몰락은 단지 도시가 파괴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마귀들의 거처, 더러운 영들의 소굴, 그리고 더러운 새들의 둥지뿐이다. 묵시문학에서 ‘더러움’은 단순한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질서가 무너진 뒤 남는 세상의 잔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래된 예언서들이 폐허의 자리에서 들짐승과 재앙의 새들을 불러 모았듯(이사 13,21?22; 34,11?15; 바룩 4,35; 예레 50,39 참조), 요한 묵시록은 대바빌론을 더러운 것들의 본령으로 선언한다. 인간 문명의 정점이었던 곳이, 몰락의 순간 가장 낮고 추한 것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 이 아이러니가 묵시의 핵심 서사다.


대바빌론이 왜 이런 추한 자리로 전락했는지 요한 묵시록은 아주 묘하게 짚어낸다. 그 중심에는 ‘난잡한 불륜의 술’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이 술은 특정 행위의 상징이라기보다, 모든 민족을 하나의 욕망의 연동 장치로 이해시키려는 은유다. 힘을 향한 갈망, 주류의 대열에 끼어들고자 하는 조급함, 사치에 자신을 비벼 넣어 존재를 증명하려는 충동, 이 모든 것이 한 잔의 술처럼 서로 뒤섞인다. 술을 마시면 가려지는 것처럼, 욕망에 취하면 자기 파멸의 흔적도 흐릿해진다.


요한 묵시록은 이 욕망의 구조를 ‘사치’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한다. 그러나 그리스어 ‘스트레노스(στρ?νο?)’는 단순한 사치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그것은 교만, 거만, 건방, 욕망의 과잉을 동시에 가리키는, 인간 영혼의 팽창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사치는 물질적 번영만이 아니다. 영적 우월감, 정신적 허영, 자리를 차지하려는 끝없는 경쟁심 모두가 대바빌론의 얼굴이다. 고대 로마의 상업적 번영을 비판하려는 의도였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욕망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이 본문은 특정 시대에 갇히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져도 인간은 여전히 같은 욕망 앞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4절에서 하늘의 목소리가 울린다.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와라.” 이 목소리는 단순한 도피 명령이 아니라, 욕망의 구조로부터 탈출을 요구하는 초대다. 하느님을 잊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종종 성공의 서늘한 그림자다. 성취와 번영의 달콤한 향이 오랫동안 영혼을 감싸면, 어느 순간 하느님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언제나 ‘나오라’고 외쳤다.(이사 48,20; 예레 50,8; 51,6.9.45 참조) 하느님께 돌아오는 길은 종종 자기 욕망의 벽을 무너뜨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6절에서는 다시 ‘잔’의 형상이 등장한다. 이미 14장에서 살펴보았듯, 이 잔은 하느님의 분노가 담긴 상징이다. 대바빌론이 누린 사치만큼, 아니 그 사치의 깊이만큼 하느님의 심판은 되돌아온다. 욕망이 잔을 채웠다면, 심판 또한 잔에 가득 찰 것이다. 


대바빌론의 목소리는 무례하고 허영으로 가득하다. “나는 여왕의 자리에 앉아 있고, 과부가 아니니 슬픔도 모를 것이다.” 이 말은 구약의 바빌론과 티로가 과거에 외쳤던 교만의 울림을 되풀이한다.(이사 47,7?9; 에제 28,2 참조) 하느님의 자리는 비워둔 채, 스스로의 힘과 화려함에 취한 이들의 고집스러운 독백, 그 마지막 회오리가 바로 대바빌론이다.


이 교만의 도시는 결국 흑사병, 불, 붕괴의 잔해 속으로 추락한다.(8절) 큰 능력 앞에 인간 문명의 허세는 먼지처럼 흩어진다. 예언자들이 오래전 예고했던 그 무거운 심판의 단어들이, 이제 다시 18장의 공기를 채운다.(이사 47,9; 예레 50,32 참조) 많은 학자가 이 장을 로마 제국 번영에 대한 영적 비판으로 읽지만, 그 의미는 훨씬 넓다. 권력의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인간의 욕망은 더 길게 흔들린다. 거대한 도시는 무너져도, 욕망의 도시는 인간 마음 안에서 여전히 건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의 외침은 고대 로마를 향한 비판이기보다,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무너져야 할 대바빌론, 우리의 과도한 욕망과 그에 대한 집착은 어디에 있는가? 그 도시로부터 “나오라”는 부름은 결국, 나 자신이 만든 욕망의 감옥에서 제발 벗어나라는 자유에의 호소다.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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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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