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빈 멜라니아(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1년 전 이맘때, 때아닌 계엄 선포로 밤잠을 뒤척이던 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국가 폭력으로 상처받은 인간을 기억하고 증언함으로써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가장 어두운 밤에도 우리를 잇는 것은 언어이며, 읽고 쓰기는 곧 희망의 증거”라는 떨리는 목소리 역시 기억난다.
그리고 지난봄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포로 시작된 희년 역시 끝을 향해간다. 교회력으로는 이미 새해가 시작되었고, 달력은 마지막 한 장만을 남긴 이 시점, 희년이 처음 내게 던졌던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된다.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희년의 주제를 처음 접했을 때 자연스레 떠오른 질문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어떻게 희망을 말하며, 또 희망을 살아낼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전쟁과 기후위기, 가짜 뉴스와 혐오가 뒤섞여 혼란과 갈등이 끊임없이 증폭되는 시대에,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력한가 싶은 절망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정국은 이런 마음을 부추겼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의 풍경은 어쩌면 1년 전보다 한층 더 거칠어 보인다. “일본은 백 년의 적, 중국은 천 년의 적”이라는 오래된 말이 다시 소환되고, 중국 동포와 이주민, 난민과 성소수자, 재난의 희생자와 유가족까지, 서로 다른 얼굴에 붙는 혐오의 이름은 끊임없이 바뀐다. 분노는 빠르게 확산되고, 거짓 정보는 더 정교하게 포장된다. 혐오는 어느새 정치, 언론, 알고리즘을 먹고 자라는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지난 계엄 정국을 지나며 드러난 혐오의 언어는 이전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탄핵 정국의 혼란 속에서는 중국인이 집회에 동원되었다는 근거 없는 추측이 온라인을 통해 퍼졌고, 이런 흐름은 확산된 반중 정서와 맞물려 이주민과 중국계 주민들에게 또 다른 불안과 위협을 낳았다. 혐오는 늘 사회가 가장 취약해진 지점을 파고들어 책임을 물어야 할 구조를 흐리고, 손쉬운 표적을 새로운 적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혐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잠식하는 병에 가깝다.
올해 인권 주일 담화에서 김선태 주교는 “우리가 혐오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악”이라고 말한다. 이는 혐오를 “나와 다름”에 대한 정당한 분노로 포장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 선언이다. 혐오가 일상적 정치 언어가 되고, 소셜 미디어와 댓글 창이 새로운 광장이 된 오늘, 이번 인권 주일은 혐오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누구와 연대할지 성찰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혐오의 피라미드가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는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희년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희망이란 “언젠가 주어질 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혐오의 표적이 된 이주민 노동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 거친 혐오 표현 뒤에 자리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 거짓 선동 앞에서는 사실을 확인하는 수고, 그리고 침묵이 더 안전해 보일 때에도 혐오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작은 결심. 희망의 순례자는 혐오의 시대에도 인간의 존엄을 꾸준히 붙드는 사람들이기에, 희년이 끝나도 희망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정다빈 멜라니아(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