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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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독일의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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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로부터 직접 받아들여졌으나, 고딕 건축이 여전히 강세인 상황에서 처음에는 장식 위주로 접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이 들어오고 프랑스의 르네상스 건축가들을 배출하면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반면에 영국의 르네상스는 프랑스보다 100년 정도 늦게 도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간도 매우 짧았고, 이탈리아로부터 직접 전해지지 않고 프랑스를 통해서 전해졌으며, 종교개혁으로 영국 국교회가 설립되어 르네상스가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르네상스도 프랑스와 영국처럼 새로운 양식을 받아들이기에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 존재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종교개혁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종교개혁은 독일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며 국가의 분열을 초래했고, 이어서 로마 대약탈과 프랑스와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독일의 종교적·정치적 상황은 악화 일변도로 흘렀습니다. 16세기 중반의 이러한 정세에서 독일은 건축 분야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은 특히 종교 건축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교회의 폐해에 대한 개혁 운동이었기 때문에, 웅장하고 권위적인 형태의 성당을 거부하였습니다. 물론 개신교회가 교회 건축에 구체적인 대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시간과 역량이 모두 부족했고, 그것은 교회 건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반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가 다시 자리를 잡기 전까지, 독일에서는 교회 건축을 제외한 성(城)이나 대형 주택, 그리고 공공 기관의 건축이 주를 이루었고, 이때 이탈리아에서 도입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적용되었습니다. 이후 반종교개혁으로 성당 건축이 다시 활기를 띠었는데, 그것을 주도한 수도회는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서 독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던 예수회였습니다.


독일 르네상스도 초기에는 프랑스처럼 고딕 성당에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요소를 일부 첨가하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건축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는 종교 시설, 주거 시설, 상업 시설, 군사 시설 등에서 모두 독일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건축의 수준이 발전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일반 건축물은 북이탈리아의 전성기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양식이 주를 이루었지만, 성당 건축은 독일 예수회를 주축으로 이루어졌고 대부분 로마의 ‘예수 성당(Chiesa del Ges?)’의 바탕 위에 독일의 고딕 양식을 혼합한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르네상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독일 매너리즘의 탄생입니다. 독일 르네상스의 경향은 독일 고딕 위에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접목되었는지 아니면 독일 고딕 위에 매너리즘이 접목되었는지로 나뉘는데, 이 중에서 매너리즘의 접목은 독일 고유의 매너리즘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독일 매너리즘이 이탈리아 매너리즘과 다른 점은 이탈리아의 매너리즘이 부정적이고 어두운 일탈을 강조한 것에 비해서 독일의 매너리즘은 긍정적이고 밝은 일탈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독일 초기의 르네상스 성당으로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성 안나 성당에 있는 ‘푸거 경당(Fuggerkapelle)’을 들 수 있고, 전성기의 르네상스 성당은 프리드리히 수스트리스(Friedrich Sustris, 1540~1600)가 설계한 뮌헨의 ‘성 미카엘 성당(St. Michaelkirche)’이 대표적입니다. 독일인인 수스트리스는 부친이 베네치아와 파도바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그곳에서 출생하였고, 이후 로마에 거주하다가 1563년부터 피렌체에서 조르조 바사리의 조수로 4년간 일했습니다.


독일로 온 그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푸거 가문과 일하였고, 1573년에 바이에른의 공작 빌헬름 5세 아래서 미술 감독으로 봉직하였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공작을 따라 뮌헨에 가서 궁정 수석 건축가가 되었으며, 뮌헨 레지덴츠(Residenz)의 공사에 참여하고, 독일 예수회의 성 미카엘 성당을 설계하였습니다.


성 미카엘 성당은 1583년에 착공하여 1597년에 봉헌되었습니다. 성당의 파사드는 3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삼각형 페디먼트가 올려졌습니다. 엔태블러처에 의해서 각 층이 나뉘는데, 각 층의 높이가 올라갈수록 낮아지고, 베이의 수와 간격이 다르기에 벽기둥의 위치도 일정하지 않습니다. 최상부의 페디먼트 역시 세 개의 수평 부재로 분할되었습니다. 이렇게 파사드의 수직 수평 분할이 엇박자의 리듬을 가지고 있는 성 미카엘 성당은 대표적인 독일의 매너리즘을 보여줍니다.



지상층은 두 개의 포털, 반원형이지만 상부가 끊어진 페디먼트, 대천사 미카엘 청동상이 있는 중앙의 벽감, 그리고 토스카나식 벽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매너리즘을 모방하여 작은 부재들을 단순한 장식으로 구성한 것은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일탈로 보이지만 그 분위기는 밝고 명랑합니다. 2층과 3층은 창과 인물상이 있는 벽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최상층의 페디먼트 벽감에는 세상의 구원자(Salvator Mundi)이신 예수 그리스도상이 있습니다.


내부는 장방형의 단일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긴 앱스 형태를 가지고 있는 제단과 성가대석의 벽체는 고딕 성당에서 볼 수 있는 3단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네이브에는 양쪽에 각각 네 개씩의 경당을 가지고 있고, 천장은 반원형의 로마식 볼트로 되어 있습니다. 네이브의 벽기둥은 코린트식이고 그 사이에 조각상들이 놓여 있으며, 경당은 창문 없이 둥근 천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네이브에서 성가대석으로 들어가는 곳에는 두 개의 아케이드로 이루어진 개선문 형태의 구조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성 미카엘 성당은 16세기 후반 반종교개혁을 통해서 가톨릭교회의 위상을 드러내며, 예수회를 대표하여 건립된 상징적인 성당입니다. 따라서 이 성당은 독일의 고딕 성당과 로마의 예수 성당이 결합한 전형적인 형태를 취합니다. 이러한 성 미카엘 성당을 시작으로 독일 가톨릭교회는 많은 르네상스 성당을 건립했으며, 여기에 장식 요소가 더해지면서 남부 독일의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바로크 시대의 성당을 맞이하게 됩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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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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