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시간과 더불어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감은 일종의 여정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영적 여정’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여정 중에 있는 존재다. 이 지상 여정은 마치 순례 여정과도 같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순례 중인 나그네이자, 순례자다. 사막 교부들의 주요 관심사는 내적생활에서의 진보였다. 그들의 가르침은 모두 여기에 초점이 놓여 있다. 즉 어떻게 하느님을 향한 이 순례 여정에서, 내적생활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다.
장작에 불 붙이기
사막 교부들은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혹시라도 타성에 젖어 내적생활에 퇴보하게 될까를 우려했다. 그들은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압바 모세가 압바 실바누스에게 물었다. ‘사람은 매일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말했다. ‘부지런하다면 매 순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실바누스 11) 요한 콜로부스는 말한다. “매일 일찍 일어나 모든 덕과 모든 하느님 계명을 실천하십시오.”(요한 콜로부스 34) “압바 포이멘은 압바 피오르가 매일 새롭게 시작했다고 말했다.”(포이멘 85)
두 수도승이 영적 담화를 나누던 중 한 수도승이 다른 수도승에게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작을 우리 마음에 비유해 볼 때, 불은 우리의 열정이라 할 수 있다. 열정이 없는 차가운 마음은 우리 영성 생활의 가장 큰 장애다. 마음에 열정이 없을 때 삶은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해진다. 열정을 상실한 마음은 수도승의 고질병인 ‘아케디아’(영적 태만)로 이끈다.
사막 수도승들은 늘 수도승 생활 초기의 열정을 간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매일 초심자로 새롭게 시작하곤 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열정의 불이 꺼지지 않게 돌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수도승은 누구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매일 불에 불을, 열정에 열정을, 열의에 열의를, 갈망에 갈망을 더하기를 절대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천국의 사다리」 1,6)
초기의 열정을 간직하고 계속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열정을 잃어 우리 마음은 불 꺼진 싸늘한 장작처럼 식곤 한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열정으로 우리 마음에 불을 붙여야 한다. 하느님을 향한 이 여정에서 열정은 우리를 지치지 않고 계속 전진하게 하는 에너지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끝없이 나아간 모세의 삶처럼
매일 새로운 열정 가슴에 품고 영적 진보 강조한 사막 교부들
익숙한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영적 여정 멈춤 없이 계속하길
끝없는 진보
그리스어 ‘에펙타시스(epektasis)’는 끝없는 진보를 뜻한다. 이 진보 개념은 특히 니싸의 그레고리우스의 「모세의 생애」에서 부각되는 핵심 개념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성 생활에 부단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불변의 존재이신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끝없는 움직임, 이것이 그레고리우스의 진보 개념이다. 영혼이 하느님과 동일하지 않다면, 선에 참여하는 영혼의 이러한 진보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느님만이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무한을 향하는 유한한 존재다. 이는 이동 중인 존재, 갈망의 존재를 의미한다.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간 삶을 산 모세가 그 전형이다.
요한 클리마쿠스도 덕과 사랑은 현세에서건 내세에서건 한계나 종료점이 없다고 말한다. 진보는 단지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생명의 표지라고 한다. 완전함의 본질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절대 완전해지지 않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위(僞)마카리우스에게서도 이 진보에 관한 주제가 나타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적 은총을 더 많이 받을수록 천국에 대한 그의 갈망은 더욱더 만족을 모르게 되며, 그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갈망으로 더욱더 타오른다. 그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가 더욱더 은총을 받아야 하고 그 은총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굶주림과 갈증을 느낀다. 그가 영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그는 더욱더 자신을 가난하게 생각한다. 천상 신랑에 대한 그의 영적 갈망은 만족을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모음집 2,10,1)
따라서 ‘충분하다. 나는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주님은 무한하시고 도달하기 어려운 분이시며, 그리스도인은 감히 자신이 주님께 도달했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밤낮으로 그분을 찾으며 겸손히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모음집 2,26,17)이다.
‘수도 생활에는 졸업이 없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이는 수도 생활이 일시적 과정이 아니라, 전 삶을 통해 이어지는 지속적 여정이라는 의미에서다. 베네딕토 성인의 표현에 따르면,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학교’(규칙 머리말 46)다. 이 학교에서 졸업이란 아마도 자의건 타의건 이 학교를 떠나게 될 때, 그리고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일 것이다. 영성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찾는 영적 여정은 끝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멈춤은 퇴보이자, 죽음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상에 있다. 성인들이 이 지상에서 도달한 이러한 완성은 단지 부활 후, “부활한 육신이 새로운 신적 옷으로 덧씌워지고 천상 양식으로 양육될 때”(모음집 2,12,14) 얻게 될 바를 미리 맛보는 것일 뿐이다. 완성에는 끝이 없다. 매일 초심자로 새롭게 시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멈추게 되고 결국 뒤로 처질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는 늘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끝없이 나아가려 노력해야 한다.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까지, 아니, 저세상으로 건너간 뒤에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