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가슴을 치는 장면은, 예로부터 이어지는 인간의 한계를 폭로한다. 티로의 멸망 앞에서 바다의 임금들이 통곡하던 모습(에제 27,16?18 참조)이 그러했고, 오늘 세상에서도 화려함에 매달리던 욕망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그렇게 절망 앞에 무너져 내린다. 땅의 임금들이란 결국 부에 대한 집착이 무너질 때 폭로되는 인간의 실존적 공포를 대변하는 얼굴들일 것이다.
그런데, 로마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요한 묵시록의 시대를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적 결핍과 가난 속에 있었다. 세상의 화려한 부는 가난한 자에게 ‘넘사벽’처럼 보였지만, 요한 묵시록은 그 벽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심판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울어야 할 이는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부와 사치를 붙잡던 이들이어야 했다. 그 울음은 찔끔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삽시간에 닥칠 불가역적인 심판의 울음이었다.(여기서 ‘삽시간’이라는 그리스어 표현은 ‘단 하나의 시간’을 뜻한다.)
부와 소유를 향해 목을 매고 사는 우리 역시, 늘 급박한 울음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더디 오지만, 결핍과 상실은 갑자기 그리고 무참하게 삶을 무너뜨리곤 한다. 본문은 이러한 부의 붕괴를 상품 목록이라는 방식으로 시각화한다. 12절부터 나열되는 물품들은 에제키엘 27장의 목록에서 빌려온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로마 제국의 활발한 무역을 반영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장로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는 동방과의 교역에서 연간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얻었다고 한다.(1세스테르티우스는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고,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는 오늘날 가치로 거의 1조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금, 은, 보석과 진주는 바빌론의 불륜을 상징했던 사치의 언어이다. 고운 아마포와 자주색 옷감도 마찬가지다. 부와 사치를 하느님의 뜻과 대립하는 힘으로 바라보는 요한 묵시록의 시선은 보석의 화려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관철된다. ‘비단’이라는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요한 묵시록에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부와 권력의 극치를 드러내는 표시였다.
향나무는 정교히 다듬어져 귀족의 탁자로 놓였고, 상아 공예품과 대리석 장식은 부유층의 집안을 가득 채웠다. 계피와 향료 역시 귀족적 취향의 일부였는데, 특히 계피는 인도에서 건너온 고급 향이었고, 귀족의 향수, 연회장의 공기 그리고 옷장과 침실의 향을 채우는 데 쓰였다. 한 리브라, 곧 300g의 계피는 2000데나리온에 해당했으니, 노동자가 5년 반 동안 일해 버는 임금과 맞먹는 가치였다.
올리브기름과 고운 밀가루는 당시 서민들이 심각하게 겪던 결핍을 떠올리게 한다. 물가가 치솟아 생존 자체가 위협받던 그 현실 속에서, 이 식품들은 단순한 재화를 넘어 굶주림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목록의 끝에 등장하는 단어 - 노예, 곧 σ?μα, ‘몸’ - 는 가장 잔인한 진실을 드러낸다. 부와 사치의 정점은 결국 사람을 몸뚱이, 노동 기계, 객체화된 신체로 만든다. 로마 제국에서 노예는 물건이었고, 오락과 향락을 위해 소모되는 존재였다. 인간의 존엄은 값으로 환원되었다.
요한 묵시록은 말한다. 부와 사치는 인간을 ‘사람답지 않게’ 만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의 구조가 된다. 14절에서 ‘네 마음이 탐내던 열매’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물질과 권력이며, 그것은 이제 찾아볼 수 없으리라고 선언된다. 욕망의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이 그 절정에 있다. 모든 선장, 선객, 선원, 바다에서 일하는 이들까지도 바빌론의 몰락을 보며 울부짖는다.(17-20절 참조) 그들은 바다 무역의 번영을 등에 업고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돈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지는 그들의 운명은 그 자체가 비극이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르다. 우리는 성도이며,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들과 성도들 그리고 살해된 이들의 피(24절 참조)는 증언의 흔적이고, 그 증언은 바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고자 하는 갈망이다. 세상의 사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만, 신앙은 인간을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는 존재로 회복시킨다.
부와 사치는 한때 달콤하지만, 지나고 나면 허무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생활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대우받는 것, 존재로서 존중받는 것, 우리의 존엄이 가격표가 아니라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글 _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