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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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식은 병마로 떠났지만 요셉의원 무료진료는 계속된다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가난한 이들의 의사, 선우경식 요셉( 5·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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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10일 대기실 환자와 대화하는 선우경식.

 

신림동에서 영등포 쪽방촌으로 이전
알코올 중독자·행려자 등 ‘단골 환자’
IMF 위기 속 후원회 조직해 난관 극복


요셉의원 개원 20년 즈음 찾아온 병마
하늘로 떠나는 날까지 환자들과 함께 해




영등포역 쪽방촌으로 요셉의원 이전

신림동 재개발은 계속 늦춰줬고, 선우경식은 1997년 초까지 요셉의원 이전 기금을 모금할 수 있었다. 많은 가톨릭 단체와 신자, 성당들에서 이전 기금을 보내왔다. 요셉의원이 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 의원이라는 가톨릭 울타리 안에 있고, 신림동에서 10년 동안 보여준 가난한 환자들에 대한 헌신적 노력이 교회 안에서 널리 알려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월 1일 요셉의원은 영등포역 부근 쪽방촌에 있는 허름한 3층 건물을 구입했다. 지은 지 25년이나 지난 건물이었지만, 더 이상 이사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진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건평이 925.85㎡(280평)로 이전 신림동 건물보다 2배 이상 넓어 보다 효율적인 진료 체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었기에 병원으로 쓰려면 대대적인 내부 공사를 거쳐야 했다. 처음 신림동에 문을 열 때처럼 모두 팔을 걷어붙였다.

5개월의 고생 끝에 건물 내부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가난한 환자들을 잘 진료하고 치료할 있는 병원을 만들겠다는 선한 마음들이 모여 이루어 낸 결과였다. 선우경식은 진료실 공사가 마무리되자 3층에 직원들과 원하는 환자들이 모여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할 수 있는 아담한 경당을 만들었다. 이 모든 일이 1987년 8월 29일 신림사거리 2층에서 문을 연 후 10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술 취한 환자에게 멱살 잡히는 날도

영등포 요셉의원의 환자는 신림동과 조금 달랐다. 가난한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던 신림동과 달리 병원 주변은 닭장처럼 만들어진 판잣집들에 주로 알코올의존증 환자, 마약중독자, 결핵과 간염 환자, 교도소나 갱생원 출감자, 주민등록이 말소된 행려자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곧 요셉의원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중에는 술에 잔뜩 취해 오는 이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1층에서 제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진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술이 깨고 난 다음에 오세요.”

“난 술 조금밖에 안 먹었어요. 왜 치료를 안 해주는 거예요.”

그들은 앞뒤 없이 생떼를 쓰거나 고성을 질러댔다. 차분히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술 냄새가 많이 나요. 나중에 오세요.”

이때부터는 육두문자가 튀어나오고 이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직원들이 감당하지 못할 때는 선우경식이 내려와 술 취한 환자들을 직접 상대했다. 너무 막무가내인 상대를 만나면 서로 밀치는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대부분의 알코올의존증 환자는 술에 취하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멱살을 잡혀도 참아가며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기에 가끔은 같이 멱살을 잡기도 했다. 그런 경우를 겪고 나면 그는 경당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참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기도를 드리며 하느님께 용서를 구했다.

영등포 요셉의원은 병원 공간이 넓어진 데다 진료과목도 늘어나고, 또 신림동에서 10년을 지내면서 가난한 환자들과 사회복지 종사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덕에 환자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다. 직원들을 비롯해 의료봉사자와 주방·이발·목욕·청소·빨래 등 병원 업무 봉사자들의 업무량도 늘어났지만, 다행히 새로운 봉사자들이 또 그만큼 들어와 보람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영등포로 이전한 지 8개월 만에 커다란 난관이 나타났다.

 
요셉의원 이념과 사명
 
2007년 10월 요셉의원 20주년 기념 행사에서 요셉의원에 대해 설명하는 선우경식 원장.
 
1997년 9월 요셉의원이 서울 신림동에서 영등포역 옆으로 옮겨 재개원할 때 방문한 김수환(오른쪽) 추기경과 선우경식(왼쪽) 원장.
 
2008년 4월 21일 장례미사. 정진석 추기경 주례 영등포 역전 옆으로 이전한 요셉의원

“가난한 환자는 의사에게 소중한 꽃봉오리”

1997년 12월, 우리나라는 IMF 사태라는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았다. 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했고, 기업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50세 안팎의 중견 사원들이 해고되면서 실업자가 급증했다. 선우경식은 이런 어려운 경제상황이 요셉의원의 운영을 어렵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주변 권유에 따라 정식 후원회를 조직했다. 후원회 회장으로는 강우일 주교의 이모이고 여성 가톨릭인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해 발이 넓은 오덕주(데레사) 여사를 추대했다. 후원회가 주최하는 음악회·전시회·바자회 등의 활발한 모금 활동 덕분에 요셉의원은 IMF의 파고를 힘들게 넘기면서 계속 가난한 환자들을 맞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셉의원의 사랑 나눔은 점점 더 알려졌고 찾아오는 환자 수도 늘어나 2006년 1월에는 2000명을 넘어섰다. 규모가 작은 요셉의원으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숫자였지만, 선우경식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료비를 한 푼도 낼 수 없는, 말하자면 의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력한 환자야말로 진정 의사가 필요한 환자다. 그래서 가난한 환자는 의사에게 소중하고 고귀한 꽃봉오리”라며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2008년 4월 21일 장례미사. 정진석 추기경 주례

암 투병하며 요셉의원에서 생의 마지막 불꽃

그러나 이 해부터 병마가 그를 괴롭혔다. 60이 넘은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동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월에는 급성뇌경색으로 쓰러졌다가 빠른 치료 덕분에 일어났다. 10월에는 상당히 진행된 위암이 발견되어 수술한 후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그는 좀 힘들지만 견딜 만하다며 꿋꿋이 고통을 이겨나갔다. 2007년 10월 그는 항암치료로 몸무게가 8㎏ 이상 빠져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요셉의원 개원 20주년 행사에 참석해 그동안의 후원과 기도에 감사 인사를 했다.

2008년 항암치료를 어느 정도 마친 선우경식은 일주일에 2~3번씩 요셉의원에 나와 간단한 진료를 하거나 봉사자와 직원들을 격려했다. 요셉의원은 20년이 지나면서 체계가 잡혀 정기후원자의 숫자도 1600명을 넘어섰고, 일반후원도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직원들과 봉사자들은 병원은 걱정하지 마시고 집에서 요양하시라고 권했다. 중요한 일이 생기면 전화를 하거나 집으로 찾아가 상의드리겠다고 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선우경식은 알고 있었다. 위에 있던 암 세포가 다른 곳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그는 생의 마지막 불꽃을 요셉의원에서 사르겠다는 심정으로 4월 14일에도 병원에 나왔다. 그리고 진주에서 올라온 호스피스 봉사자 10여 명에게 1시간 넘게 봉사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이야기를 나눈 후 귀가했다. 그리고 12시간 후쯤인 4월 15일 새벽 3시경 집에서 쓰러졌다. 여동생이 119를 불러 병원으로 옮겼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4월 18일 새벽 4시, 요셉의원에서 20여 년 동안 가난한 환자들과 함께했던 선우경식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그와 함께했던 병원 관계자들과 그를 거쳐 간 환자들, 동료 의사들 중 아무도 그를 보내지 않았지만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랑했던 요셉의원은 그날도, 장례식 날도, 오늘도 문을 활짝 열고 가난한 이웃을 치료하고 있다.

 

이충렬 실베스테르, 작가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톨릭평화신문 공동기획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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