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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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유리알] 아무도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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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이 등장하는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에 머문 적이 있어요. 저는 결혼식에 여러 번 가봤지만, 한 번도 술이 떨어진 잔치를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만 술이 떨어졌는지 궁금했어요. 어쩌면 ‘예수님이 거기 있는 술을 다 드셔서 떨어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왜 어머니 마리아가 갑자기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했는지 이해가 됐어요. 아들 예수님이 책임지라고 하신 게 아닌가. 묵상 속에서 그랬지요. 저는 예수님을 언제나 새롭게 보려고 합니다.”


글을 쓰다가, 털보 수염의 이어돈 미카엘 신부님(Michael Riordon,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인터뷰 중 하신 묵상 이야기가 떠올라 혼자 킥킥대며 웃었다. 이 분은 내가 만난 사제 중에 가장 유쾌한 분이셨다. 기억에 남는 인물들은 대개 특징이 있다. 만화 <뽀빠이>에 나오는 악당 부르터스는 까만 털보 수염을 가졌고, 영화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스승 윌리엄 수사는 하얀 수염에 안경처럼 생긴 돋보기로 주변을 살폈다. 신부님께는 털보 수염이 있었다.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칼럼 ‘당신의 유리알’의 마지막 편 마지막 문장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궁리하고 있었다. ‘여러 작가가 했던 것처럼, 끝나지 않는 문장으로 여운을 주면 어떨까?’라는 생각. 제주도 이시돌 목장까지 향하는 여정은 인생의 스승을 기다리던 내 오랜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흐름에서 보면, 신부님을 마지막 칼럼의 주인공으로 선정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오랜만에 본 신부님의 진갈색 수염은, ‘세월’이라는 이름을 견디지 못하고 희어져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신부님을 만나면, ‘어떻게 하시다 사제가 되셨는지’ 자주 여쭤본다. 이 신부님은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넌 사제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하면, 노는 걸 좋아해서 “죽어도 하지 않겠다. 만약 하더라도 외국은 절대 나가지 않겠다”라 말했다고 하셨다. 역시 인간은 계획하지만, 하느님은 지긋이 웃으시는 법이다.


“우연한 기회에 이시돌 목장에 수의사로 선교를 가게 됐어요. 가족들은 다들 반대했지요. 이상하게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엄청 많았는데, ‘간다’고 결심하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선교사로 가는 대신, 후원금을 더 많이 내겠다고 하셨어요. 아마도 이시돌 목장의 임피제 파트리시오 신부님(1928~ 2018)이 이 말씀을 들었다면, 아들보다 돈을 더 보내라고 했을지 몰라요. 하하하. 재미있는 이야기는, 당시 비행기로 제주도에 갈 때 경유지에서 영국 공항 직원이 도착지를 물었는데 한국이라고 했더니 막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오기가 생겨서 더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어렵게 도착한 제주에서 2년 반을 그렇게 지냈습니다. 너무 좋아서 고향 아일랜드로 돌아와,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어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제가 아일랜드로 휴가를 갔는데,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있었어요. 한국을 두고 ‘다음 주에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한 겁니다. 엄마는 바로 ‘너의 고향은 여기야!’ 하셨어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지요. 제 소임이 있는 자리를 고향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말씀을 듣는 내내 나는 이어돈 신부님의 유쾌한 매력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해졌다. 신부님처럼 털보 수염을 기르면 그렇게 될까. 그럴 수도. 이어돈 신부님을 처음 뵌 건, 중학교 때 간 주일학교 캠프에서였다. 아이들은 여름 산타를 만난 것처럼, 신부님을 강물에 빠뜨리려고 양팔에 매달렸고, 대형 곰 인형처럼 큰 덩치의 신부님은 청년, 아이 할 것 없이 물속에 던져 넣으며 웃으셨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것으로 어린 나는 사제가 되고 싶었다. 이분이야말로 영화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스승 윌리엄 수사처럼 인생의 길을 보여주실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런 스승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신부님이 내가 살던 성당으로 오시게 된 사연은, 사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저는 도시 빈민 사목을 위해 한국말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서울 신정동성당에 계신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주임 신부님이, 갑자기 보좌신부로 오라고 했어요. 그러나 ‘선교회의 미래’를 말하며 거절했지요. 그런데 ‘계속 오라’고 채근하셨어요. 저는 화가 나서 가기 싫다고 했습니다. 결국 신정동성당은 제 새 임지가 되었습니다. 성당은 25번 버스를 타고 갈아타서 가야 했는데, 버스를 탈 때까지도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러나 흥분된 마음이 긴 버스 여정 속에서 사그라지고, ‘이런 마음으로 가면 그곳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나도 행복하지 못할 거야. 이왕 가는 거 잘살아 보자’는 마음으로 바뀌었지요. ‘감정’이라는 건 자주 변합니다. 사랑은 감정과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거지요. 기쁨은 이렇게 ‘자기 결정’으로 가능합니다. 행복의 길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신부님은 “신정동성당에 계시는 동안, 본당신부의 보좌가 아니라, ‘본당의 보좌신부’로, ‘누구든 문을 두드리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사제’로서 행복하셨다”고 했다. 새로운 만남이 보물인 이유는 거기에 이렇듯 숨겨진 사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한 말씀 더 청했다. 


“예수님이 수난 하신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어요. 거기서 예수님은 세 번이나 넘어지시지요. 그러나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넘어지신 것만이 아니라, 매번 ‘다시 일어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프고 고된 일이 때로는 좋은 일일 수 있어요. 제가 이곳 분들과 갈등이 있을 때, 그 일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다시 기도했을 때는, 그 기도가 이뤄졌지요. 우리의 기도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랬다. 


이어돈 신부님의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은, 털보 수염에서가 아니라, 유쾌한 미소와 ‘용서할 힘을 청하는 기도’였다.


살면서 나에게 딱 맞는 스승을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그런 사람은 오지 않았다. 어쩌면 지혜의 스승들이 온다 해도 단지 지혜를 담는 그릇일 뿐, 그들의 인간적인 빈틈에 곧 실망할 것이다. 이제는 누군가를 스승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오지 않는 스승이나 삶의 비결을 찾아 헤매는 대신, 이미 사랑의 원본으로 내 앞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볼 테니까. 그러면.…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 그동안 ‘당신의 유리알을 집필해 주신 박홍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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